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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지옥에서 살아남은 9살짜리 꼬마가 어느덧 마흔 살의 아저씨가 되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 그는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악몽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았다. 9살 때 형제복지원에 갇힌 뒤 3년간 그곳에서 겪은 고통을 작품에 생생히 녹여냈다.

전시를 감상하기 전 먼저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장애인, 무연고자를 비롯해 일반인을 불법 감금한 일이다. 복지원 안에서는 폭력, 성폭행, 강제 노역 등 가혹행위가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는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정부가 주도한 내무부 훈령이 근거가 됐다. 이곳에서 맞아서 죽거나 불구가 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당시 강제로 입소된 사람은 3900여 명이고 드러난 사망자만 513명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종선 작가는 지난 4월 28일부터 58일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특별법 통과를 외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지난 2012년에는 1인 시위 도중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를 만나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책에 삽화를 넣은 것을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근 그의 작품을 모은 제17회 서울변방연극제 공식초청작 <한종선 그림전> 전시가 서울 용산 ‘공간 해방’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다. 한 작가는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9일 오후 2시, <본지>는 전시장을 찾아 한종선 작가에게 작품 설명과 함께 당시 참혹함을 들었다. 역시 백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점이 주는 울림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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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위한 ‘문화적 투쟁’

기자는 10평 남짓 포근한 전시장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작가를 만났다. 허리가 아프다는 그와 함께 전시장 한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전시회를 열게 된 계기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통해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을 글로 썼지요. 하지만 글로 말 못한 부분도 있었고…. 그림으로도 얘기하고 싶었어요. 투쟁의 방법 중 하나가 문화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그림전은 ‘문화적 투쟁’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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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리로 둘러싸인 전시 공간을 ‘유리방’이라고 했다. 유리방에는 한 작가의 트라우마, 현대사회의 집단 이기주의를 비판한 작품이 걸려 있었다. 벽에 걸린 큰 그림은 그가 세상에 나왔을 때 겪었던 세상의 편견, 소외된 차별로 인해 속상하고 답답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었다. 

   
▲ 한종선 작가 ⓒ투데이신문

한쪽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작품도 있었다. 인생 절반을 형제복지원 때문에 찢어진 가족이라는 조각을 맞추는 게 일이었던 그의 애환이 녹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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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1984년, 한 작가는 아버지,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됐다. 입소한 지 얼마 안 돼 두 사람의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그는 목격했다. 이 때문에 그는 두 사람이 사회에 나와서도 온전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꿈이기를 바랐다. 3년이 지나 형제복지원이 폐쇄됐을 때 아버지와 누나를 만나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2007년, 한 작가는 군산 장병 숙소를 짓는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 이후 산업재해 신청을 하러 다녔으나 거절되자 기초생활 수급 신청을 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와 누나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울산, 누나는 부산에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을 만난 곳은 정신병원이었다. 한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한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냈다. 왜냐하면 자신과 누나를 형제복지원으로 보낸 사람이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정신병원에 가서 치아가 하나밖에 없는 비쩍 마른 아버지를 앞에 두고,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대화를 했다.

아버지는 형제복지원을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짐승이 사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이에 한 작가는 “아들과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나”라고 하니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눈을 피했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여기 앉아있는 내가, 당신의 아들 한종선이다”라고 밝혔다. 25년간 가슴 속 쌓아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연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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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버지가 파출소 순경,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계속 얘기를 듣다가 우리를 형제복지원에 맡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내 가족인데’하는 마음으로 보듬기 시작했죠”.

형제복지원에서 누군가에게 맞고 있으면 때리지 말라며 안아주던 누나. 하지만 힘들게 찾은 누나의 모습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한 작가는 정신병원의 허락을 받고 누나와 처음 외박을 나간 일화를 들려줬다.

“누나가 잠깐 화장실을 가겠다고 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참다못해 화장실로 가니까 누나가 변기 위에서 초코파이를 먹고 있는 거예요. 당시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교회에 가면 초코파이를 주곤 했는데 이마저도 빼앗기니까 화장실에서 몰래 먹었거든요. 누나가 그때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초코파이 언제든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누나를 달랬죠. 또 그날 저녁에는 내가 김밥을 사러 간 사이 ‘누가 잡아갈 것 같다’면서 도망을 치기도 했어요. 나는 그냥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누나의 뒤를 따라갔어요. 행여라도 누나가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무서워할까 봐 두려워서요”.

얼마 뒤 한 작가는 정신병원에 있는 누나를 데리고 나왔다. 하지만 누나와 함께 사는 게 쉽지 않았다. 누나는 정신질환으로 인해 폭식하거나 따뜻한 물이 나옴에도 씻는 걸 거부했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다시 들어갔고 한 작가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빠지지 않고 누나에게 꼬박꼬박 면회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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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서 겪은 일들이 과장이나 거짓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자,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 나와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에요. 물론 과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피해자들은 오히려 ‘약하다’고 말하거든요. 정말 더 적나라하게 우리의 피해를 끄집어내면 보려고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어요”.

한 작가는 현재 형제복지원 피해자 중에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도 있고 뇌막염, 심부전증, 췌장암 등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생활고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그 역시 돈을 벌고자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허리 디스크를 얻어 고생하고 있다. 그는 종종 깊은 잠에 들려는 순간, 다리가 마비되는 느낌이 든다고 호소했다. 이를 두고 한 작가는 마치 ‘하반신이 뜯겨 나가는 고통’이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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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감상을 마치고 나온 윤모(24)씨는 “사실 형제복지원 사건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림을 보니까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화가 나기도 한다. 한종선 작가님이 당시 힘들어하셨던 게 그림을 통해 느껴진다”면서 “앞으로 더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미술을 전공한 관람객 신채린(23)씨는 “다른 사람,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은 있지만 차라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게 편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며“그림전을 통해 아픔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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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겹도록 맞았다”

한 작가와 함께 전시장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유리방의 문을 여니 세면장으로 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이곳을 ‘타작방’이라고 칭했다. 타작방에서는 구타와 가혹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형제복지원에서 물은 몸을 씻는 게 아닌 고문의 용도로 바뀌었다. 그에게 타작방은 공포가 결집된 공간이자 떠올리기 싫은 곳이었다. 한쪽에는 피를 뜻하는 빨간색이 몽둥이에 색칠돼 있었다.

한 작가는 타작방에서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며 10살이었던 그때의 경험을 또렷이 기억했다. 당시 자유시간, 그는 높이 쌓여있는 푹신한 옷 위에서 콩콩 뛰었다. 순수했던 꼬마는 아마 그 위를 마치 침대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뛰고 있던 모습을 조장에게 딱 걸렸다.

혹한의 겨울, 세면장에 끌려간 그는 심한 구타와 함께 손발이 묶인 채 물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때 충격으로 한 작가는 무더운 여름에도 몸을 찬물로 씻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 트라우마가 문신처럼 새겨져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다.

타작방의 문을 열면 타임머신을 타고 ‘형제복지원’으로 갈 수 있다. 골목 같은 공간 곳곳에 한 작가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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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선” = “84-10-3618”

처음 마주친 그림은 범죄자처럼 숫자를 들고 있는 9살 아이 한종선이었다. 형제복지원 입소자들의 존재는 이름이 아닌 숫자로 각인됐다. 사람들이 입소하면 먼저 번호를 부여받은 뒤 사진을 찍어야 했다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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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은 시간의 통로가 되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이곳에서는 대변과 소변도 30초에서 1분 사이에 해결해야 했고 달이 뜬 밤에는 취침 대신 동성 간 성폭행을 겪어야 했다. 성폭행의 가해자는 조장이나 조장급에 속하는 힘 있는 형들이었다. 맞기 싫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수용자들은 ‘히로시마’로 불리는 물구나무서기를 30분이나 1시간가량 실시하기도 했다. 한 작가는 이를 그림을 통해 묘사하고 있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자 조장을 향해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비는 그림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아이의 얼굴에 피와 눈물, 콧물이 뒤섞여 범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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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눈을 떼자 정면에 거꾸로 매달린 온몸이 피로 뒤덮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조장이 말을 듣지 않는 한 사람으로 본보기 삼아 매단 뒤 개 패듯이 팼다고 회상했다.

   
▲ 한종선 작가 ⓒ투데이신문

바로 옆에는 파란색 체육복을 입은 노인이 쪼그려 앉아 있는 그림이 있었다. “어떤 분을 그린 것이냐”고 물으니 “10년 뒤 내 모습”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아직도 형제복지원과 같은 곳이 존재한다면 내가 10년 뒤 아무 의미 없이 햇볕이나 쬐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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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돌리니 아이가 쓴 듯한 짤막한 일기가 적혀 있었다.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기 전 쓴 일기를 그대로 재연해놓은 것이다. 수돗물이 아닌 짜장면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워 행복해하던 꼬마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는 한 작품을 가리키며 ‘악마는 붉은 태양과 함께 온다’는 제목을 붙였다. 한 아이가 달려가고 있고 뒤에는 그림자가 붙어있는 그림이었다. 기자가 타작방의 문을 열며 나가려고 하자 한 작가는 “아직 안 끝났어요”라며 다급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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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으로 ‘사회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쓰인 팻말을 가리켰다. 우리는 천천히 그 골목을 걸었고 이내 파란색 철문이 등장했다. 

“관람객이 답답한 그림을 보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끔 의도했어요”.

굳게 닫힌 철문을 활짝 열자 눈 부신 햇살이 우리를 비추었다. 아스팔트 위에서는 아지랑이가 눈물처럼 뜨겁게 솟구쳤다. 9살짜리 아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집은 지금 어디에 있나. 

   
▲ 한종선 작가 ⓒ투데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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