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나는 인문학계열인 국문학(한국 한시 전공)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이렇다보니 몇 군데에서 ‘인문학’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맹자』, 『한비자』와 같은 중국 사상서의 내용을 강의했고, 우리나라 선비들의 좋은 말을 모아서 책을 내거나 강연을 하기도 했으며, 전공인 한시를 가르쳐 보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일부 유명교수들이나 하던 것을 나도 하게 된 것이다. 이게 다 근년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 덕분이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돈이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자리 잡아 버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제고하려는 대중들의 요구, 특정 사안에 대해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획일적 시스템에 대한 반감이 인문학 바람을 불게 만든 원인이 되지 않았는가 한다. 인문학에 속하는 이른바 ‘문학·사학·철학’의 주된 관심은 사람이고, 사람의 다양한 삶의 모습과 생각이기 때문이다. 옛사람과 현재의 사람이 주장하는 각종 학설을 통해 비전공자들은 지식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고 답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인문학에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정답이 있어 본 적이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난 사상가라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편의상’ 단정을 지었을 뿐, 자신의 말이 만고의 진리라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노자는 ‘도를 도라고 말해 버리면 그건 이미 일정한 도가 아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사람한테 ‘여러 가지의 삶 또는 사는 방법’이 있다고 읽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선가(禪家)의 선언도 마찬가지다. 일차로 권위에 눌리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진리는 언제고 변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이 말에는 ‘주체성을 가지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학’에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설(說)’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비전공자들은 그 ‘설’을 배우고, 자신도 ‘설’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지, 책이나 학자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시중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몇 몇 인문학자들을 보면 자신이 전공한 학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판단하고, 심지어 남의 삶에 개입을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몇 십 년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이루어 낸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학문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 까지는 좋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디뎌 공식적으로 단정을 짓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더 이상 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런 일은 심리상담사나 종교인이 하는 것 아닌가. 인문학자는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 아닌가. 입으로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대중한테 답을 정해서 강한 문체와 어투로 내리꽂아 버리는 ‘학자였던’ 사람이 참으로 많다.

인문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나도 포함)이 절대로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만들어 온 역사, 사람 마음을 탐구하는 철학, 사람의 삶을 표현하는 문학을 전공하다 보니, 일정 수준(편의상 해당분야에 박사학위를 갖고 있거나, 노력의 결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라고 해 둔다)에 도달하면, 자신이 사람이나 사회를 모두 안다는 착각을 하기 시작한다. 대중이 호응을 해 주면 대담하게도 자신의 말이 진리라고 믿으며, 선언을 해 버린다. 뛰어난 비평가라고 하는 사람, 독설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설’일 뿐이지 ‘정답’이 아니다.

이쯤에서 인문학자들의 설을 정답으로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글과 말에 열광하는 다수의 대중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자기 분야에선 일가를 이루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분야로 넘어가면 일반인하고 똑같다. 특정 학자를 존경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한테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고, 그들의 말은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알려주는 지식은 받아들이되, 그들이 제시하는 지혜는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세상은 인문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문학’이 들어가는 제목의 책을 살 돈으로, 그런 강연을 들을 돈으로 재미있는 소설책을 사서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게 훨씬 삶에 보탬이 된다고 본다. 아니면 친구와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훨씬 경제적일 수도 있겠다. 이런 것이 맘에 들지 않으면 혼자 조용히 앉아서 공상을 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무용담’이나 ‘충고의 탈을 쓴 잡소리’를 들으며 귀를 더럽히고,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일 보다 훨씬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자의 통찰력을 믿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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