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부랑아 단속한다며 일반인도 강제 수용
폭력·성폭행·강제노동까지…가혹행위 증언 쏟아져
수용자, 진상규명 및 특별법 제정 촉구
한국판 아우슈비츠… 독일처럼 반성 필요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형제복지원, 그 이름은 예뻤지만 본질은 추악했다.

쓰레기가 청소차로 치워지듯 거리의 사람들은 그렇게 쓸려갔다. 이어 ‘형제복지원’이라는 자애로움의 탈을 쓴 감옥에 가둬졌다. 그곳은 악마의 소굴이자 지상의 지옥이었다고 피해 생존자들은 말한다. 아직도 그들은 끔찍했던 악몽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1975년 무렵, 전두환 정부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거리의 부랑자 단속을 지시한다. 같은 해 내무부는 부랑인 신고‧단속‧수용‧보호 등에 대한 지침을 토대로 내무부 훈령 제410호를 만든다. 국가의 정책 차원에서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이 진행된 것이다.

내무부 훈령은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단속과 강제 구금의 근거를 마련했다.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 자리한 형제복지원은 무연고자, 부랑아, 일반인을 격리해 불법으로 강제 노역, 성폭력, 폭행, 협박 등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1975년 7월 5일부터 1987년 6월 30일까지 그 기간만 무려 12년이었다. 신민당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자는 드러난 수만 3900여 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513명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부랑인이 아닌 일반인까지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는 점이다. 주민등록증이 없던 자, 껌을 팔던 자, 기차를 놓쳐 역 휴게실에서 자던 자, 술에 취한 자, 가벼운 시비가 붙었던 자 등 종류도 다양했다. 가족이 있는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28년이 흘렀지만 상처의 흔적은 문신처럼 남아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 “부랑인 수용 근거”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수용 근거는 내무부 훈령 제410호였다. 이는 1975년 12월 15일에 발령된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을 뜻한다. 

훈령에 따르면 단속 대상은 ‘일정한 정주가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터미널 등 많은 이들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앉아 구걸 혹은 물품을 강매해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해하는 모든 부랑인’(규칙 제1장 제2절)이다. 여기에 준부랑인은 ‘노변 행상, 빈 지게꾼, 성인 껌팔이 등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들’로 규정해 단속 조치를 시행했다.

신민당 조사보고서에는 국가가 경찰 승진 시 가산점을 부여해 많은 사람이 형제복지원에 입소하게 됐다고 적혀있다. 1986년 기준으로 전체 수용자 3975명 중 수용 의뢰기관이 경찰은 3117명, 구청은 253명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산시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비영리 법인체였다. 하지만 국가는 결산보고, 안전점검, 교육 실효성, 원생에 대한 행정지도, 감사를 하지 않았다. 또 경찰 내부 근무 평점이 구류자는 2~3점, 형제원 입소는 5점으로 매겨졌다. 이 때문에 경찰은 승진을 위해 부랑인 단속을 더욱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 입소 경위… “느닷없이 누가 나를 잡았다”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가 제공한 피해자 증언 자료를 보면 형제복지원 입소 경위는 다양했다.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유 없이’ 혹은 ‘속아서’ 복지원에 들어갔다고 증언한다.

“7살 때 부산 남포동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탑차가 서더니
성인 남성 서너 명이 와서 다짜고짜 나를 잡아 차에 타라고 했다”
“팔각정에서 연 날리는 거 구경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누가 나를 잡았다”
“부산역에서 잠을 자다 잡혀갔다. 선도차에 몽둥이 들고 검은 옷 입은 남자들 여럿이 다니다가
역전에서 자는 사람들을 막 때리고 끌고 갔다”
“부산에 있는 브**** 회사에 다니다 퇴근길에 난데없이 잡혀가게 됐다”
“6개월간 기술을 배우면 나올 수 있다고 해서 갔다. 하지만 거짓말인 것을 늦게서야 알게 됐다”
“한 제복 입은 아저씨가 버스에 타라고 해서 탔다가 입소했는데 왜 들어가게 됐는지 모르겠다”

수용 당시 인권침해 여러 피해자의 증언도 충격적이다. 그중에서 일부만 소개하겠다.

“안 맞는 날이 이상한 날이다. 쓰러져서 정신을 못 차린 적도 한번 있었다”
“동성 간에 성폭력이 많았다고 들었다. 나도 당한 당사자고….”
“기절하면 뺨을 막 때리거나 물을 부어서 깨운다. 깨어나면 또 맞는다”
“여성들 경우엔 직원들이 성폭행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놀다가 창문으로 내가 직접 봤다”
“복지원에서 죽은 사람의 80%는 전부 다 구타 때문이다. 병으로 숨졌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교회 뒤에 산이 있었는데 거기에 (시신을) 다 묻어버리는 것이다”
“점호하고 나면 문을 걸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하면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월급 같은 걸 받아본 적은 없다”

   
▲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 수용자 강제노역으로 만든 ‘피의 건물’

수용자들은 형제복지원 시설 내 모든 건축물 터를 닦는 것부터 시작해 시공, 완공에 이르기까지 중노동을 했다. 형제복지원의 건물은 어떤 기계도 없이 수많은 피해자의 희생으로 지어졌다는 게 각종 자료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 여러 사진에 아이들이 흙벽돌을 나르는 장면이 있다.

또한 박인근 원장은 자신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고자 원생에게 하루 10시간 이상 중노동을 하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증언 등을 토대로 살펴보면 형제복지원 자체 건물 만드는 일에 수용자가 투입됐다. 장롱을 만들거나 낚시제조와 같은 외부업체에서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어린아이는 일식집 생선회 접시에 올라가는 장식용 우산 제작에 투입됐다.

심지어 강제노역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박 원장이 매년 20억 원가량의 국고를 지원받았지만 원생들에게 일당 300~500원, 요양원은 3일에 토큰 1개(100원)를 줬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피해 생존자 중에서 급여를 받았다는 증언은 아직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형제복지원은 봉제공장, 철공소 등에서 노역을 시키고 부실한 음식을 제공해 막대한 금액을 가로챈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 메뉴는 꽁보리밥, 생선 썩은 전어젓, 소금 뿌린 배추김치와 같은 깍두기, ‘똥국’이라고 불리는 시래기 된장국 등이 있었다. 간식은 밀가루로 만든 호떡 모양의 빵이었다. 이에 수용자들은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제대로 씻지 못해 피부병에 시달렸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식 체제로 편성됐다. 숙소 이름은 1소대, 중대, 대대로 불렸으며 대장, 중장, 소장, 조장 등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입자, 반항자에 대한 구타나 폭행, 가혹행위는 일상적이었다. 복지원 간부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폭행당한 원생도 많았다고 한다.

   
▲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피해자 한종선 “형제복지원, 사람 껍데기 쓴 짐승 사육장”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피해자 한종선 씨는 2012년 5월경,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촉구를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또 그해 11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의 도움을 받아 형제복지원 피해증언집 <살아남은 아이>를 출간했다. 그는 국회의원 등의 도움으로 피해자 증언대회를 여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씨는 1984년경 자신과 친누나에 이어 아버지도 함께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다. 그는 복지원이 폐쇄하던 1987년까지 이곳에서 3년간 머물렀다.

그가 증언한 내용과 <살아남은 아이> 등에 따르면 한씨는 1984년 부산 봉래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생이었고 작은 누나는 같은 학교 4학년생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와 누나를 데리고 시내를 돌며 극장, 용두산 공원 등을 구경시켰다. 동광파출소에 들른 뒤 아버지는 두 아이에게 “조금 있다가 올게”하며 밖을 나갔다. 이후 동광파출소 앞으로 형제복지원 차량이 왔고 한 순경이 서류에 사인하자 두 아이는 형제복지원 차량에 태워졌다.

형제복지원의 일상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했다. 먼저 모든 수용자는 새벽 4시에서 4시 30분경에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난 뒤 5분 이내로 침구를 정리하고 4열 종대로 인원점검을 받는다. 이어 수용자들은 세면장에 가서 손바닥에 굵은 소금 한 줌과 손가락으로 양치를 했다. 물 세 바가지로 모든 세수를 마쳐야만 했다. 아침 6시쯤이 되면 소대별로 열을 맞춰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식사는 늘 5분 이내였고 선착순으로 끝마쳐야 했기에 이마저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무엇보다 성폭행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강제로 동성 간 성폭행이 일어났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는 조장 침대에서 약한 소대원의 신음과 헛구역질 소리를 들었고 목격했다. 그 역시 이런 피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가혹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기합과 몽둥이질을 당했다. 어떤 소대원은 엉덩이와 허벅지가 피범벅이 되도록 맞았다. 심하게 맞던 소대원이 똥을 싸면 조장은 그 똥을 먹으라고 하거나 죽을 정도로 때렸다. 주로 맞은 부위는 엉덩이, 허벅지, 발바닥이었는데 폭력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몽둥이는 곡괭이 날이 없는 자루나 참나무를 소금물에 불려 만든 것이었다. 그가 홍역이 걸렸을 때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팬티만 입은 채 30분간 몸을 뒤집으며 열을 식힌 적도 있다.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하는 건 일상이었고 단체 기합도 많았다. 무릎을 꿇린 채 허벅지 위에 손등을 밀착해 붙이면 조장은 몽둥이로 이들의 손바닥을 때렸다. 또 열중쉬어 자세로 조장이 주먹으로 복부나 명치, 얼굴 등을 때렸다. 이때 움직이면 더 심하게 맞았다.

겨울이 되면 동상에 걸려 손과 발이 퉁퉁 붓기 일쑤였다. 때로는 양쪽 발가락이 썩어 결국, 발가락을 모두 잘라야 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간질에 걸린 수용자가 맞다가 발작을 하면 발로 밟거나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더불어 그는 한겨울 손과 발이 묶이고 팬티 한 장을 입은 채, 차가운 세면장 바닥에서 물고문을 두 번 당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때 후유증으로 찬물 공포증이 생겨 그는 한여름에도 찬물 샤워를 못 한다. 그뿐 아니라 누가 잡으러 올 것 같은 마음에 불을 끄고는 잠도 못 잔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산산이 무너졌다.

한씨는 “경찰에게 신변이 강제로 인수인계된 것 자체가 공권력에 의한 감금이자 납치”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가족은 형제복지원에서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짐승처럼 살아야 했다”며 “형제복지원 삶은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짐승사육장과도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 ⓒ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작품

드러난 사망자만 513명… 죽음 원인도 의혹 투성이

피해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마땅한 병·의원 시설도 없어 의료방치로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잦았다. 도망치다가 잡혀 매를 맺다가 숨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은 사망자 대부분 심장질환, 신부전증 등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하는 등 은폐를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의 시체가 암매장되거나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렸다는 얘기도 있다.

무엇보다 수용자들은 구타당하다가 숨진 경우가 많았다. 1987년 5월 20일, 김용원 검사가 실시한 강모씨에 대한 진술조서를 살펴보자.

“86년 12월경 양모 씨라는 한쪽 팔뚝이 없는 사람이 연필을 갖고 편지를 쓰다가 적발됐는데 개인이 연필을 소지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고 형제복지원 안에서 생활상을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는 이유로 우주복을 입힌 뒤 침대에 두 발, 두 다리를 꽁꽁 묶어뒀다. 또 4일간 밥도 주지 않고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그를 때린 이는 임모 소대장이었다”.

유기치사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지만 이와 관련, 당시 검찰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4월 13일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옹호위원회에 접수돼 부산지방검찰청으로 이첩된 강모씨(당시 25세‧2년 6개월간 수용)의 인권침해 진정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폭행을 당해 불구가 된 사람들의 보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너무나 어이없는 세월이었다. 누가 그 많은 사람을 학대하게 했는지 절규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모 씨(당시 49세‧5년 3개월간 수용)가 김용원 검사에 진정한 내용을 봐도 마찬가지다.

“형제복지원에서 탈출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한층 더 엄하게 원생들을 심하게 매질하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매 맞아 죽는지 알 수 없다. 75년에서 86년도까지 513명의 사망자도 태반은 매 맞아 죽은, 억울한 개죽음이다. 한곳에 배치가 오래 있지 않고 자주 다른 소대로 옮겨지기 때문에 6년간 내 눈으로 본 것만 해도 부지기수다. (중략) 중환자가 생기면 곧바로 병원에 이송해야 하지만 도망간다는 이유로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며칠씩 앓다가 그때야 비로소 부랴부랴 병원에 후송시키고 있다”.

   
▲ ⓒ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작품 (사진제공= 서울변방연극제 박민석)

김용원 검사가 말하는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

이 사건은 어떻게 밝혀졌을까. 1986년 12월, 부산지검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가 우연히 산행을 하던 중 당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 소유의 울주군 농장에서 노역하는 원생을 보고 수사에 들어간다. 다음 해 3월에 탈출하려다가 잡힌 수용자 1명이 관계자의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청와대를 비롯해 검찰, 부산시가 수사에 압박을 가했다고 김 검사는 언급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수사를 확대하던 중, 윗선의 압력 때문에 수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2013년 3월,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김용원 검사의 발표문을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1987년 1월 16일, 형제복지원에 내려가니 건물마다 출입문에 안팎으로 견고한 자물쇠 장치가 돼 있었다. 이 시설은 사회복지시설이 아니라 완벽한 감금시설이었다. 병동이라는 곳은 밖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중증 결핵 환자들이 수용된 곳이라 들어가지 말라고 안내자는 말했으나 나는 들어갔고 흉측한 몰골의 사람들 수십 명이 여기저기 모여있었다”.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을 두고 상지대 법학부 김명연 교수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 3월, 세간 주목을 받을 때까지 무려 12년간 정부 당국의 수용 정책과 시설 운영자들의 경제적 타산이 빚어낸 끔찍하고 중차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 특별법 발의… “진상규명 필요”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위한 움직임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3월 24일,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이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하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 외 문재인, 심상정, 최민희 등 국회의원 55명도 뜻을 함께했다.

제정안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피해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조사‧심사‧결정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고 의결하고자 국무총리 소속 형제복지원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를 둔다.

형제복지원 특별법을 발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나아가 그에 따른 보상이 목적이다. 만약 진상규명위가 생기면 최초 진상규명 조사 개시를 결정한 날부터 2년간 진상규명 활동을 한다. 이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피해 정도 등을 고려해 보상금,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주거복지시설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 법안이 발의되면 은폐된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 유족의 명예회복과 함께 적절한 보상을 통한 피해자의 생활 안정, 인권신장을 기대할 수 있다.

지난 3일, 형제복지원 특별법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 당시 법무법인 지평 이근동 변호사는 “가해자에 대한 책임추궁 방안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 변호사는 “현행 형사소송법(제249조)상 공소시효는 최대 25년이 지나면 완성된다. 이에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이 발생한 지 약 28년이 흘렀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현재 모두 완성된 상태”라며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위로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된 입법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법무법인 동화 조영선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박인근 원장의 개인 횡령 등에 대한 문제로 왜곡되고 축소됐을 뿐, 당시 수용자 3000여 명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곳에 강제로 격리돼 노동을 해야 했는지, 폭행으로 죽음에 이르렀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조 변호사는 “위헌, 위법적인 훈령에 근거한 감금 등의 행위는 고의에 따른 불법행위를 구성, 복지원에서 감금, 강제노동, 폭행 등 가혹행위, 치사 등은 관리·감독의 소홀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다뤄질 예정이다. 피해생존자와 유가족 등은 해당 특별법이 통과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 (사진제공=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박인근 원장, 징역 2년 6개월 선고받았지만…

박인근 원장은 ‘자비에 의한 부랑인 선도시설 마련과 부랑인 선도’라는 공적으로 1981년 4월, 보건사회부 장관이 추천한 국민포장도 받았다. 1984년 5월 11일, 박 원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당시 형제복지원이 국가 지원과 감독을 받던 사회복지법인이었기 때문에 국가와 부산시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경찰 등 관계 공무원들은 내무부 훈령에 규정된 ‘부랑인’과 ‘부랑인에 준하는 자’의 범위를 포괄적 해석, 단속과 수용을 할 수 있다고 봤다. 박 원장을 수사했던 김용원 검사는 외압 때문에 수사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전두환 정권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왜곡하고 은폐 혹은 축소한 것으로 밝혀졌다.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87년 1월경 특수감금, 초지법, 건축법(초지에 대한 무허가 건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업무상횡령),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을 포함해 직원 5명이 구속됐다. 박 원장은 1987년에 징역 10년과 벌금 6억 8178만 원, 같은해 11월 1차 항소심에서는 벌금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더불어 이듬해 7월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1989년 7월 11일, 대법원은 박 원장에 대해 일부 횡령 혐의를 인정해 벌금 없이 2년 6월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살인·폭행·불법감금 혐의과 관련해서는 기소되지 않았다. 

그는 형제복지원을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 느헤미야법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2013년, 느헤미야법인 산하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인 ‘실로암의 집’을 운영했다. 지난해에는 법인을 매각해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박 원장은 수익사업으로 온천, 헬스장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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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과거사 반성하는 독일 닮아야

지난 1월 26일, 독일 베를린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며 “독일이 행했던 끔찍한 행위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기억하는 것이 독일인의 영구적인 책임”이라고 전했다.

메르켈 총리의 연설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이 총리의 말처럼 우리나라 역시 늦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조사, 가해자들의 사죄가 이뤄져야 한다. 정부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의 지원방안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정신 장애, 신체 불구 등 여전히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는 피해자들의 상처 고름을 짜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지금이 제2의 형제복지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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