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세종실록』의 1438(세종 20)년 8월 1일 기록을 보면 여성을 성폭행한 성균관 생원(生員) 두 사람에게 장형(곤장) 80대를 친 일에 대한 기록이 있다. 생원이라고 하면 조선시대의 과거 가운데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다. 당시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지금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것은 고시보다 시험을 보는 횟수도 적고, 뽑는 사람도 적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원칙상으로 천민 계급만 아니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양반 가문에서 과거에 많이 응시했다고 보았을 때,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 권력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원래 두 사람은 성균관(成均館) 문묘(文廟)에 전알(奠謁, 술을 올리고 제사를 지냄)하기 위하여 치재(致齋, 몸가짐을 정갈히 함)하는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서 두 생원(生員) 최한경(崔漢卿)과 정신석(鄭臣碩)이 반수(泮水)라는 강에서 목욕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때, 한 앳된 부인이 편복 차림으로 여종 둘을 거느리고 도보로 반수의 길을 건너는 것을 보았고, 최한경이 홀랑 벗은 채 갑자기 뛰어나가 앳된 부인을 쓸어 잡고 희롱하며 성폭행을 시도 한 것이었다.

이에 피해자인 부인이 완강히 항거하고, 그의 계집종이 자기 집 안주인이라고 항변하자, 두정신석이 여종을 구타하고 쫓아냈고, 최한경은 결국 그 부인을 성폭행 하였다. 뒤이어 부인이 쓰던 입자(笠, 갓의 일종)을 빼앗아서 재실(성균관에서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로 돌아왔다. 계집종이 집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고했고, 그 집에서 사내종을 시켜 사태를 관찰한 결과 이미 사태는 종결된 상태였다. 이에 그 사내종이 즉시 성균관에서 숙직하던 관리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빼앗긴 입자를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균관 숙직 관리는 생원 두 사람을 추궁하였고, 두 사람은 사실을 실토하였다. 그런데 실토한 사실이 좀 이상했다. 즉 자신들은 희롱만 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희롱은 있었지만, 성폭행은 없었다는 의미이다. 한 때 유행했던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고 얘기한 것과 그 뉘앙스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자 성균관 숙직 관리가 다시 피해자의 사내종을 불러서 다시 추궁하였는데, 그 종의 대답도 이상했다. 그 종은 성균관 숙직 관리의 추궁에, “다만 겁주려고 한 말입니다. 사실은 여주인이 아니고 주인의 유모(乳母)의 딸입니다.”고 말한 것이다. 다른 관리 한 사람이 그 집 사정을 아는 척하고 꾸미면서, “네 주인의 유모는 본래 딸이 없는데 어찌하여 이런 소릴 하느냐.”라고 추궁하였다. 도박으로 치면 블러핑, 속된 말로 뻥카를 친 것이다. 이에 그 종은 다시 말을 바꾼다. 즉, “아닙니다. 바로 주인의 ‘비첩(婢妾, 여자 노비였다가 첩이 된 사람)’입니다. ‘비첩’이란 소리가 싫어서 숨긴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성균관 숙직 관리로서도 피해자의 종의 말이 세 번이나 변하자, 그 진술의 신빙성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성균관 숙직 관리는 목격자인 두 계집종을 불러서 대질심문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그 사내종은 다시 이들이 집에 없다고 대답하였다. 성균관 숙직 관리는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피해자의 집에서 사헌부에 고소하였는데, 이것은 성폭행이 성희롱으로 바뀌게 된 이 사태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사대부 집안의 일이라서 아무도 제대로 말을 못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사헌부는 원칙에 따른 의견을 세종에게 제시하였다. 즉 최한경이 성폭행을 시도한 것은 확실하다는 전제 아래 법에 의거하여 곤장 80대를 때려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세종은 다시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사헌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고, 피해자의 진술은 한결같아서 법대로 처리해야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세종은 최한경에게 장 80대를 시행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서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해자 집의 종이 피해자의 신분을 바꾼 것이다. 그 종은 처음에는 집안의 부인→유모의 딸→비첩의 순서로 신분을 바꾼다. 이것은 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서의 수치심을 막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가해자와의 사전 모의로 신분을 천민으로 바꾼 것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 남성이 천민을 성폭행 했을 경우 천민 인구의 증가라는 차원에서 죄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헌부의 대처였다. 사헌부는 피해자의 진술에 무게를 두고 성균관 생원들에게 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다. 지금도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의 진술에 더 무게를 두는데, 지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최근 여당의 모 의원이 성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뒷거래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사건은 지금의 이 사건에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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