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최근 필자는 최소한 몇 조의 예산에 더하여, 수만 명의 인생이 좌우될 문제에 관련되는 바람에 구설수에 올랐다. 각오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이런 일을 겪으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다. 이권이 걸린 문제가 늘 그렇듯이,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 내세우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기까지야 아는 사람 다 아는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사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다. 인간이 이럴 수 있는 동물이라는 점이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지적이 있어왔으니 새삼스러울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각 사회마다 이런 본성 때문에 전체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 한다. 그것을 일단 ‘검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차피 인간은 모든 문제를 자기 편리할 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니, 그나마 어느 쪽이 사회에 더 도움이 되는지 양쪽의 주장을 다 밝히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런 검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사회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사리사욕 채우기에 놀아나는 일을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검증’은 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가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는 점, 두말하면 잔소리다. 검증을 조작할 수 있으면, 그로 인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단순한 계산으로 뽑아낼 수 없는 수준까지 갈 수 있다. 사회적으로 검증이 필요한 분야일수록 막대한 이권이 걸려 있기 십상이니까, 검증과정에 장난을 쳐서 원하는 결론을 공인받아 막대한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조작된 검증으로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쪽에서는 심각한 절망감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사회는 제대로 검증되는 것은 없이, 뒷말만 많은 것 같다. 앞서 필자가 구설수에 올랐던 문제, 터놓고 말해서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냐는 문제도 그에 속한다. 직접 걸린 자금만 2조에 달하고, 일이 잘못되면 수십조에 달하는 피해가 날 수도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심포지움 한번과 언론에서 성의 없이 몇 번 언급한 이후 흐지부지 묻혀 버리고 있다.

그만큼 투명하게 일이 처리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는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너무나 당연하게 실현되어야 하는 일이 원칙대로 되지 않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년간의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제대로 된 검증에 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문제만 하더라도 검증이 흐지부지 끝난 이유가 대충 드러나는 것 같다. 엉뚱한 곳을 백제 왕성으로 지목해서 대규모 발굴사업을 벌이는 일이 우리 사회에 주는 피해를 막으려는 의도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각 언론사에서 논란의 핵심을 그렇게까지 성의 없게 다루고, 후속 검증은 고사하고 논란의 결과에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내세운 명분보다, 이 사업이 대권주자로 꼽히는 누구와 연결되어 있으니 적당히 논란을 일으켜 방해하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조 단위의 세금이 걸리는 문제에 대한 검증이 이런 수준이니, 웬만한 문제에 검증을 기대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기보다, 적당히 이권을 챙기고 검증이 된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필자의 눈에도 그런 경우가 자주 눈에 띈다. 풍납토성 관련 논란에서만 해도 그렇다. 왕성이라는 근거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것도 작년의 발굴된 도로를 가지고 대단한 증거나 나타난 것처럼 심포지엄 직전에 보도하는 것만 해도 그렇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비를 가린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은 고전에 속한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런 눈가림을 바탕으로 여론을 조작하기도 쉬워진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공개되는 정보는 충분히 검증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는 검증의 필수조건이기는 하다. 사실 보는 사람 몇 되지도 않는 곳에서 붙어서 시비를 가린다고 해봐야 하나마나다. 바득바득 억지 쓰는 꼴을 보고도, 개인적인 입장에 휘둘리기 십상인 사람들 몇 명 앞에서 시비를 가린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니까.

하지만 이는 검증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를 악용할 수 있는 수법이 개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수법은 비교적 간단하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불러올 문제일수록,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분야와 연결되어 있다. 대중들은 그런 분야 골치 아프다고 쳐다보기도 싫어한다. 이런 심리를 이용해서 새빨간 거짓말을 퍼뜨리면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거짓말을 짚어내기 시작해도 대책이 있다. 운동경기에서 하듯이 그런 사람을 물어뜯는 ‘마크맨’을 붙이면 된다. ‘마크맨’은 굳이 전문가일 필요도 없다. 주워들은 얘기 아무거나 갖다 붙이며 ‘너는 틀려먹었다’고 몰아가면 그만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골치 아픈 분야에 관심 갖지 않는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필자에게도 이런 족속들이 여러 번 달라붙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 이 양상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경험이 있다.

이것이 검증을 망가뜨리고 여론을 조작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법이다. 이런 수법이 이유는, 온라인 등으로 올리는 내용에 책임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권력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니까. 여론을 조작하고 싶은 쪽에서는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은 족속들을 내세워 없는 문제 일으키거나, 있는 문제 덮어버릴 수 있다. 하긴 잃어버릴 것이 많은 전문가도 권력 있는 쪽에 잘 보일 수 있다면 이런 일에 나서는 경우 많으니, 뭣도 모르면서 나서는 족속은 더 많을 것이고 조작에 나서 줄 인적자원을 걱정할 필요도 없겠다.

이렇게 해서 공개적인 논의를 무력화시켜 놓으면 자기들 원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기는 더 쉬워진다. 열린 공간에서는 검증을 제대로 하기 더 곤란해진다는 점을 내세워 몇 안되는 사람들이 결론을 내는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몇 사람이 내린 결론을 가지고, 검증을 거친 것이라 내세우며 이용하면 그만이다. 현실에서는 어떤 목적에서 이건 철없이 날뛰는 일부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무책임 때문에 검증이 무력화된 다음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마음대로 결정을 내리는 방향으로 유도되는 꼴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책임질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열린 공간으로 끌어내어 결론을 낼만큼 싸움을 붙이고, 그 내용을 공개적으로 남겨 놓아 사회적으로 매장될 만큼 책임을 지도록 하면 된다. 시간이 촉박한 한 두 번의 말싸움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을 수 있으니, 영향력 있는 언론에 글로 시비를 가리게 하는 편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런 싸움을 피해 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런 검증을 거치지 않으려 하면 공기관만이라도 모든 지원을 끊어버리도록 해야 한다. 좀 험악한 방법일 수 있으나, 그래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크게 병들어 있는 것 같다.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유리하게 이용할 것인가에만 골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니까. 검증을 방해해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집단의 농간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사실 검증을 조작해서 재미를 보아온 집단일수록 제대로 된 검증을 하고 싶을 리가 없다. 이런 집단에 휘둘리며 피해를 보기 싫으면 험한 방법이라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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