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에 등장하는 르네 미셸은 부유층이 주로 사는 고급 아파트를 27년 동안 관리하고 있는 수위 아줌마다. 늙은 과부에 못생기고 뚱뚱한데다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쉰네 살 먹은 아줌마를 아파트 주민들은 눈여겨보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사람들이 수위 아줌마라는 범주로 고착시킨 사회적인 믿음”을 충족시키는 자신의 외양을 가면으로 삼아 수위실에서 남들 몰래 고상한 부르주아적 취향을 만끽하는 것. 그녀는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난해하고 두꺼운 철학 서적을 즐겨 읽는가 하면, 값비싼 다기에 일본 전통차를 내려 마시며 고급 과자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어려운 환경 탓에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열일곱에 결혼해 일찍부터 살림과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르네는 평생 수많은 책을 읽고 어려운 철학 사상을 독학하는데서 지적인 위안을 얻어왔다. 이 “프롤레타리아 독학자”가 떠들어대는 온갖 현학적인 독백에 비하면 부유한 주민들의 행태는 신경질적이고 쓸모없는 것 일색이다. 르네는 스스로를 “현대 엘리트들의 선지자”로 자부할 만큼 뛰어난 문화적 취향을 향유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처한 계급적 처지를 벗어나게 해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는다. 단지 어두운 수위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은닉한 채 고상한 취미생활을 방해받지 않고 싶을 뿐.

르네의 이중생활은 부유하고 교양 넘치는 일본인 가쿠로 오즈가 이 아파트에 이사를 오면서 전환을 맞게 된다. 다른 주민들과 달리 오즈는 르네를 신사적으로 대하는 한편 그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다. 르네 또한 그와 자신의 공통점을 직감하고 처음에는 주저하지만 이내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다. 일본에 대한 프랑스의 동경 섞인 편견에 편승하여 소설이 결말에 이르는 점은 못내 아쉽지만, 아파트 수위는 으레 몰취미하리라는 편견을 비트는 인물 설정은 참신하다.

그러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교차하는 공간을 아파트로 설정한 것은 참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를 넘어 우리네의 사정까지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압구정이나 청담동 소재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의 갈등이 기사화될 때, 우리는 평소에 묻혀 있던 계급 갈등이 패륜과 막장 드라마 버전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류의 기사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입을 모아 강남 부르주아 아줌마들의 몰상식을 성토한다.

경비원에게 반성문을 써오라고 요구하거나 동물원 원숭이 대하듯이 과일을 던지는 일부 주민들의 엽기적인 행태는 너무나 만연해 있는 노동자 탄압을 떠올리면 사실 그다지 엽기적인 것도 아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쌍용차 사태나 노동유연화를 핑계로 유연한 해고를 예고하는 정부의 파렴치 등을 생각해 보자. 그러한 굵직한 갈등에 비하면 경비원과 아파트 입주민의 갈등은 사소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갈등의 경중이 아니라 어디서나 유사한 패턴의 갈등이 반복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예컨대 모욕적인 처사를 견디지 못하고 경비원이 분신하자 경비 용역 업체를 통째로 갈아 치워 버렸던 압구정 아파트 주민들의 야박함은 유연하고 가차 없는 해고로 노동자들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기업 및 정부의 태도를 빼닮았다. 경비원에게 반성문을 써오라고 재차 강요하는 모 주민의 태도는 희대의 땅콩회항의 주인공 조현아가 승무원을 닦달하고 몰아세우던 그 태도와 판박이다.

우리네 그악한 사회에서 경비원은 고상한 취미는커녕 최소한의 존엄조차도 보전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기 일쑤가 되었다. 비단 경비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언제든지 그러한 처지에 빠질 수 있을 정도로 이 사회는 견고한 틀을 잃고 질척질척한 진흙탕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경비원을 못살게 구는 아줌마들이 화제가 될 때마다 그네들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누구 한 사람을 향해 혀를 찬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부분에서부터, 차근차근 생각을 키워나가자. 경비원과 입주민이라는 두 계급이 충돌하는 아파트는 곧 모순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기에, 경비원의 존엄을 생각하는 일은 곧 우리 모두의 존엄을 생각하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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