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군인권센터, 크고 작은 군인권침해 사건마다 앞장서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벌써 1년…군 당국, 또 다른 가해자

군 외부 감시제도 도입 필요…피해 최소화
군인권 문제 전담 ‘군인권보호관 제도’ 발의

징병제와 모병제 혼합한 형태의 제도 도입돼야
군대서 인권침해 발생시 외부 도움 요청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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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20살 꽃다운 청춘은 끝내 군대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윤 일병은 온몸에 피멍을 안은 채, 가족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군대 첫 휴가를 집이 아닌 하늘나라로 갔다.

모두가 가슴으로 울었던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었다.

故 윤 일병은 지난해 3월경부터 사망한 4월 초까지 선임 병사들의 인격모독, 성희롱, 구타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숨졌다. 윤 일병이 사망했던 4월 6일도 선임 병사들은 그가 냉동만두를 쩝쩝거리며 먹는다면서 막무가내로 폭행했다. 평소 가해 병사들은 윤 일병이 대답을 못하고 말이 어눌하다는 등의 이유로 때리거나 괴롭혔다.

그가 세상을 뜬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진실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해 7월 31일, 군인권센터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임태훈 소장은 군 당국이 발표한 윤 일병의 숨진 원인을 두고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발생한 뇌손상”이 아니라 “선임들의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이라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군이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묻힐 뻔했던 사건이 군인권센터 임태훈(40) 소장의 폭로와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현재 가해 병사들은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임태훈 소장은 양심적 병역 거부로 1년 4개월간 복역생활을 했다. 이후 국가인권위원회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 등에 참여하며 군인권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2009년 10월, 군인권센터를 설립하게 된다.

2011년 뇌수막염에 걸렸으나 병원에 가지 못해 숨진 노 훈련병, 2013년 부관의 성추행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오 대위 사건…. 임 소장은 군 인권침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진상규명을 촉구했고 재발방지를 위해 애썼다. 또한 그는 군복무 중 학자금 대출 이자 면제를 실현시키고 뇌수막염 예방접종을 의무화했다.

우리는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을 통해 가장 치욕적이고 잔인한 군대의 이면을 봤다. 아울러 군대라는 조직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권위적인지 목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가혹행위와 같은 인권침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군대 내 가혹행위는 쳇바퀴 돌아가듯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정부는 일이 터지고서야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그때마다 우리도 달아오른 냄비처럼 뜨겁게 분노하나, 이내 차갑게 잊어버린다. 군대에서 ‘가혹행위’라는 덫에 걸려 허우적대는 병사의 모습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임태훈 소장은 군인권 침해 문제를 앞에 두고 눈 감지 않으며 고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을 바로 뜨고 우직한 감시자를 자처한다.

<본지>는 지난 19일 군인권센터에서 “군인이 우리를 지켜주듯, 우리도 군인을 지켜줘야 한다”고 말하는 임태훈 소장을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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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권센터를 설립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하다.

: 군인권센터를 설립할 무렵 군인권에 대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군인권문제를 아무도 다루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선언한 뒤 2005년, 감옥에 들어가 1년 4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게 일더라.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병역거부자에 대해 “나도 군대에 다녀왔는데 너희는 무슨 양심이 있어 병역을 기피하냐”고 했다. 병역 ‘거부’와 ‘기피’는 엄연히 다른 의미인데 말이다. 어쨌든 군대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하는 군인권 실태조사 용역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막상 속을 들여다보니 군인권문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군인권센터를 설립하게 됐다.

-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이후로 이를 폭로하고 끈질기게 군 당국에 책임을 물은 군인권센터가 주목받았다. 당시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소장님이 앞장섰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수사 기록을 검토했을 때 이 사건이 워낙 잔인하다고 해야 할까. 유가족 역시 윤 일병이 4월에 사망했지만 정확한 경위는 7월 중순이 돼서야 우리를 통해 알게 되셨다. 그 자체로 가족 입장에서는 충격이었을 테다.

- 윤 일병 유가족이 2~3번 면회할 기회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가해자들의 방해로 좌절됐다고 들었다. 부모님은 아들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으셨을 듯하다.

: 윤 일병을 군대에 보낸 뒤로 부모님이 100여 일 동안 한 번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나 역시 이를 어머니께 듣고 나서 알았다. 군에 들어간 지 100일이 안 됐으니까 휴가를 못 나온 건 그렇다고 해도 면회 때도 보지 못한 건 몰랐다. 어머니가 “내가 미친 척하고 아이를 보러 갈 걸,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며 자책을 많이 하셨다.

- 현재 윤 일병 유가족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 현재 가해자에 대해 대법원의 상고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군 당국의 은폐 의혹과 관련해 고소도 해놓은 상태다. 윤 일병의 부모님은 편하게 지내지 못하신다. 두 분 모두 정신과 진료를 받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가해자도 가해자지만, 군에 대한 원망이 크다. 일각에서는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을 굉장히 삐뚤어진 개인(가해자)의 일탈로 본다. 가해자들과 군 당국을 떨어트려놓고 보기도 하는데 나는 군 당국이 곧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야만적인 상황이 발생하도록 방치한 게 군 당국이 아닌가. 우리 사회의 무책임함과 일부 국민의 인식도 문제라고 본다. ‘군대는 가서 좀 맞아도 된다. 그래야 군기가 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윤 일병 사건’ 이후 군인권 문제에 대해 한 단계 성숙된 국민 의식이 생겼다. 점점 국민이 계몽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물론 아직 멀었긴 하지만, 최소한 군대에서 ‘맞을 짓’이라는 건 없다는 점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 그래도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이후 군인권 문제를 바라보는 군 당국의 인식과 태도가 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되는데.

: 군 당국이 구타를 비롯한 가혹행위나 이런 것들을 반 인권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태도와 이런 범죄가 잘못됐다고 인식하는 것 같다. 하지만 군이 이런 문제를 바꿀 만한 인식전환은 크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해 부하나 병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자원’에 머무르고 있다. 마치 바퀴가 굴러가다가 펑크가 나면 스페어타이어를 갈아 끼우면 된다는, 그런 인식을 여전히 갖고 있다고 본다.

일례로 얼마 전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소행으로 보이는 지뢰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부사관 두 사람이 발목이 나가거나 엉덩이 뒤쪽이 무너져 내리는 등의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폭발 사고가 북한 소행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최윤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다음날 폭탄주 술판 회식을 벌였다.

미국에서 미중부사령관이 이런 일이 터지고 난 다음날에 폭탄주를 마신다? 만약 그러면 미국은 그 장군을 바로 해임할 것이다. 아마 국회에서 자르라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가만히 있지 않나. 이 사고로 20대 꽃다운 청춘의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는데, 합참의장이 술판을 벌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원래 합참의장과 수방사령관은 술을 마시더라도 자기 관사에서 마시게 돼 있고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 왜냐하면 수방사령관은 쿠데타를 진압해야 하므로 가급적 만찬도 관사에서 다 한다. 합참의장도 마찬가지다. 합참의장은 전쟁이 나면 최종적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이다. 이게 인권문제로 치환해본다면 어떻겠나.

-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이후 군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장님의 행보가 어땠는지 듣고 싶다.

: 국회에서 군인권개선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이들이 9개월 동안 활동을 마치고 결의안이 통과됐다. 결의안의 골자가 된 ‘군인권보호관’이 입법화돼 여당을 중심으로 법안이 만들어졌고 만약 법안이 통과되면 내년에 이 제도가 도입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국가인권위원회 안에 차관급 한 명을 더 신설하고 군인권본부를 만드는 것 등이 있다. 군인권보호관은 군인권센터가 주장해왔던 독일식 국방옴부즈만의 한국 명칭이 되는 것이다.

‘윤 일병 폭행 사망사건’ 이후 우리 군인권센터는 줄기차게 외부 감시기구를 둬야 하고 이 감시기구는 독립성이 있어야 하며 부대를 상시 방문하고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밝혀왔다. 이 주장이 관철돼 법안화까지 된 것이다. 아울러 해당 결의안에는 ‘군사법원의 폐지’도 들어가 있고 진료권 확충, 군대 내 성폭행 문제도 다 포함됐다. 윤 일병 사건 이후 군인권센터가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문제와 관련해 대안이 마련되고 입법화, 제도화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물론, 이런 제도가 시행된다고 당장 군대 내 인권침해가 사라진다고 볼 순 없겠다. 하지만 예방적 효과가 있을 것이고 사건이 발생하면 신속한 구제절차 통해 제2차 피해와 가해를 막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서 관계자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지에 대한 감시는 꼭 필요하다. 결의안에 따르면 군인권보호관은 사건에 대한 절차를 국방부에 보고하게 돼 있다. 국방부는 주로 군인권 문제보다 군의 무기 도입, 전비태세 등 국방 본연 업무에만 충실해왔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국방부도 군대 내 인권문제를 직접 챙겨야 하는 법적 의무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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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 국회에서 이를 통과하지 않으면 다음 총선에서 해당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반대 혹은 미온적이거나 통과되지 않도록 했던 원인 제공자에 대해 유권자가 심판할 것이다. 무엇보다 군대에 자녀를 보낸 부모들, 앞으로 보낼 사람들에게 이 법안이 큰 선물이 될 수 있으므로 아마 법안은 통과될 것이다.

- 윤 일병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소장님이 군대 내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뛰어다녀 사람들로부터 군인권센터가 ‘군인권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 ‘윤 일병 폭행 사망 사건’을 언론에 처음 공개할 때 사실 이 정도로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다. 재보궐선거로 한창 시끄러워 언제 공개할지 고민하고 있던 때 모 방송국에서 이 내용을 보도한다는 소리를 듣고 지켜봤다. 그런데 이 방송사는 이 사건에 대한 수사자료는 확보하지 못했고 공소장만 갖고 있었다. 보도 내용이 충분치 못해 군인권센터가 유가족 동의로 그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감행했다. 그 이후 사망 원인에 대한 2차, 3차 기자회견을 이어갔다.

이를 폭로하자 군인권센터로 연세 드신 분들의 전화가 쇄도했다. 한 분은 “시간이 지나면 군대 환경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안 좋아지더라. 이제 손자가 군에 가야 할 텐데 이런 군대를 어찌 믿고 보내겠나”라고 하셨다. ‘21세기 군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한 중년 여성분은 “너무 분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센터 청소라도 하겠다”고 하시기도 했다. 어쨌든 이처럼 센터로 시민들의 전화가 굉장히 많이 왔다.

- 활동하면서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던 사건도 참 많이 접하실 듯하다.

: 당시 해병대 2사단 참모장인 오모 대령이 한 운전병을 성추행한 사건이 있었는데 1~2심에서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다. 이 사건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얼마 전, 징역 2년형이 확정된 노모 소령 성추행 사건도 잊을 수 없다. 여성인 오 대위가 노 소령에게 성추행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치열한 법정공방이 있었고 가해자 측 변호사가 군인권센터와 피해자 법률대리인을 고소하기도 했다. 물론 무혐의 처분이 되긴 했지만. 징역 2년이 확정된 노 소령은 지금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복역 중이다.

오 대위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새롭게 시도한 게 ‘심리부검’이다. 국립공주병원 이영문 원장님을 비롯한 그 팀이 심리부검을 해서 오 대위가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 노 소령의 괴롭힘과 성추행 때문임을 입증했다. 2심 고등군사법원에서 오 대위의 심리부검을 상당 부분 인용해 유죄 근거로 작용됐다.

- 심리부검이라는 개념이 생소한데 설명 좀 부탁한다.

: 심리부검이란 숨진 사람이 남긴 일기장이나 메모 등 기록을 바탕으로 고인의 심리 상태를 부검하듯 조사하는 것이다. 즉, 정신과 의사가 죽은 이에게 말 걸기를 한다고 보면 된다. 오 대위의 경우 일기장, 유서, 군에서의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는 범죄학에서 오래전부터 실시하고 있는 제도다.

- 군대에서 희생된 장병의 유가족을 만날 때마다 소장님은 어떤 심정인지.

: 자식을 잃은 고통은 고통 중에서도 가장 크다고 한다. 오 대위 부모님은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많이 우셨다. 어머님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특히 아버님은 딸을 굉장히 많이 사랑하셨다. 종종 오 대위 아버님께서 내게 전화를 주신다. 통화하면서 아버님이 “소장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좋아질 것 같아서 전화했다”는 말을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 단단히 드셔야 한다”, “울고 싶으면 우셔도 된다”고 말씀드린다. 아버님이 법정에서 굉장히 많이 우시고 분노하셨다. 가해자의 뻔뻔함과 가해자 마누라의 뻔뻔함 때문에 더더욱…. 무엇보다 군 당국이 출입기록을 삭제하는 등 가해자를 감싸고 도니까 상처를 받으셨다.

딸은 열심히 군 생활해서 장군이 되는 게 목표였는데,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니 부모 마음이 어떻겠나. 오 대위와 근무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그녀는 성실하게 일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단다. 그런데 노 소령을 부관으로 만나면서 인생이 꼬인 것이다.

- 당시 윤 일병 유가족분들 역시 많이 힘드셨을 것 같다.

: 처음 윤 일병 유가족은 그가 어떻게 숨졌는지 잘 모르고 계셨다. 그런데 자세한 내막을 우리 군인권센터를 통해 확인하고 난 뒤 거의 모두 뒤로 넘어가셨다. 이후 1차 기자회견을 하고 난 뒤 다음 날 저녁, 윤 일병 유가족이 우리 사무실로 오셨다. 부모님은 그제야 아들 윤 일병이 어떻게 자랐는지 등을 얘기하셨다. 나는 계속해서 어머님께 “아들(윤 일병) 얘기가 듣고 싶다”고 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아버님이 굉장히 많이, 펑펑 우셨다. 나 역시 내가 어떻게 인권운동을 하게 됐는지부터 시작해 우리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날 가족 모두와 함께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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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장님은 인권문제 해결뿐 아니라 유가족분들이나 피해 병사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역할도 함께 하고 계신 것 같다.

: 그런 역할도 필요하다. 내가 피해자 편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피해자나 유가족이 일상에 돌아가야 하므로 계속 사건에 매달리는 것을 권하지 않고 있다. 상고심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방향성을 잡게 해드린다. 그렇지 않으면 유가족들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므로 일상이 힘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윤 일병 부모님에게 “나한테 전화 안 해도 되니까 어머니, 아버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부모님이 아들 몫까지 행복하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두 분이 계속 이렇게 울면서 사시면 천국에 간 아들이 가슴 아파할 것이다. 나머지 삶을 아들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교과서적인 얘기인 것 같지만 마음 아프게도 이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 그렇다면 소장님은 군인권의 수호자로 활동하면서 언제 보람을 느끼시나.

: 군인권침해 가해자가 재판을 받고 판결을 정당하게 받으면 보람을 느낀다. 예를 들면 2011년,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노우빈 훈련병 사건이 생각난다. 조용히 묻힐 뻔한 것을 우리 인권센터가 폭로했고 이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샀다. 이를 계기로 입대하는 전 병사에게 뇌수막염 예방접종이 필수가 된 성과를 냈다.

또 급성기 환자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많이 달라져서 보람을 느꼈다. 예전에는 병사가 아프면 군의관 앞에까지 가는 데 오래 걸렸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다. 지난 2013년에 내가 군병원을 다니면서 조사를 해보니 (병사가 아프면) 빠르면 하루 만에, 늦어도 2~3일 안에 군병원으로 들어오더라. 이것이 ‘노우빈 훈련병 사망 사건’ 이후 생긴 변화다.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병사가 아프면 군대에서는 뜸을 들였다. 왜냐하면 훈련이 먼저고 해당 병사가 빠지면 누군가가 일을 대신해야 하므로 약 하나로 때우려고 했던 경향이 있었다. 급성기 환자는 의사에게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급성 장염이나 뇌수막염은 초기 증상이 감기와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급성기 환자 중에서 열이 올라가게 되면 바이러스와 염증 수치가 확 올라간다. 이게 2차 병증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사건 이후 급성기 환자에 대한 응급후송에 대한 체계가 잡혀가는 걸 우리가 확인했다. ‘우빈이’의 희생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작은 변화라고 보고 있다. 

- 지난해 <디펜스21+> 김종대 편집장과 함께 쓴 <그 청년은 왜 군대 가서 돌아오지 못했나>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 이 책은 김종대 편집장의 제안으로 쓰게 됐다. 사실 나는 책을 쓸 마음이 별로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인권운동을 하신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가 “인권운동가는 글쓰기를 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글쓰기를 너무 즐기면 행동이 과소화된다. 인권운동가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나 역시 이 말에 동의했고. 그런데도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군인이 우리를 지켜주듯, 우리도 군인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나라와 우리의 공동체를 지킨다. 그들은 생명과 안전, 재산, 우리가 싸우는 헌법적 가치를 적으로부터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 우리도 군인을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군인들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우리도 군인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군인의 인권을 지키려는 사람이 늘어나면 제도도 순기능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군대도 국민의 눈치를 보며 인권 문제에 충실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군대 내 인권 침해가 줄고 문제가 발생해도 가해자를 엄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는 바람, 아니 욕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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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소장님께서 책을 통해 “5년간 살려달라는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다”고 쓰셨더라.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가슴이 저렸다. 군인권센터에는 주로 어떤 전화가 걸려오나.

: 군대 내에서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가 권리구제가 되지 않는다며 전화를 하신다. 성추행이나 가혹행위 피해자들, (인권침해 신고 이후) 2차 피해를 보거나 수사기관에 의해 사건이 축소되거나 재판이 졸속으로 이뤄질 경우, 피해 병사 부모들이 살려달라고 전화를 하기도 한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우리는 바로 부대에 간다. 우리는 피해 병사에 대한 정신과적 진료가 미진하면 진단서를 밀어 넣거나, 재판에 앞서 기소 죄목을 변경한다든지 피해자 법률대리인을 붙여 2차 가해가 번지지 않게끔 한다. 또한 2차 가해에 동조한 사람들이 있으면 사단장에게 이 병사에 대한 징계를 요구한다. 그게 안 먹히면 기자회견 통해 폭로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는 여러 군인권침해 사안에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 군대에 간 병사들이 폭행, 성추행 등 가혹행위나 인권 침해를 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 절대 혼자 끙끙 앓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군인권센터든, 국가인권위원회든 어디든지 전화를 해라. 정 안되면 힘들겠지만 부모님께 알려야 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대학 안에 학생 생활상담소나 성평등센터라는 게 있더라. 자신이 다니던 대학에 전화해서 상담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 그렇다면 ‘기수 열외’와 같은 정신적인 가혹행위도 신고할 수 있는 건가.

: 당연히 이 역시도 신고해야 한다. 기수 열외는 사기를 떨어트리고 전투가 발생하면 사고의 원인이 된다. 적진하고 싸울 때 들고 있는 총이 어디로 가겠나. 실제 베트남전에서 그런 일이 많았다고 한다.

만약 기자님에게 입사동기가 있다고 치자. 회사 내에서 기수별로 선후배 체제가 있을 텐데 ‘기수 열외’라는 것은 동년배 그룹에서 “너는 우리 기수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후배가 선배를 보고 인사도 안 하고 무시하게 된다. 이를 당한다면 기자님 기분이 어떻겠나. 그래도 기자님은 근무가 끝나면 퇴근을 할 수 있고 정 힘들면 회사를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군대는 그게 불가능하고 온종일 한 방을 같이 쓴다. 이 때문에 피해 병사는 더욱 미치는 것이다.

- 기수 열외를 당한 병사 입장에서는 폭행을 당해 몸에 상처가 남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신고를 해도 가해자가 부인하면 소용이 없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 그렇지 않다. 어차피 조사하면 다 나온다. 그리고 성추행 역시 은밀한 곳에서 당하면 증거가 남지 않는다. 입증하기가 어렵지만 진술을 토대로 조사하면 된다.

- 일각에서는 군대 내 인권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모병제’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소장님의 생각이 듣고 싶다.

: 나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합한 형태의 제도가 과도기적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본다. 모병제는 월급을 줘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는데, 이는 막대한 예산을 들어가야 한다는 측면이 있다. 모병제를 실시하면 현 65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감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므로 전략적으로 징병제와 모병제를 병행하는 게 어떨까 싶다. 독일처럼 징병 기간을 줄이면서 모병을 늘리는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대안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군인권 문제의 해결사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지 기대된다.

: 군인권센터의 하반기 계획은 “우리가 시민을 만나러 거리로 나가는 것”이다. 현재 이에 대한 캠페인 전략을 짜고 있다. 군인권센터 콜번호가 적힌 명함을 배포하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시민분들이 군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고 군인권센터와 같은 곳에 참여하셨으면 한다. 군인권센터는 전체 재정의 20% 넘지 않은 선에서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한다. 그 외 경상비는 재정자립도가 거의 100%다. 많은 분들이 우리를 후원해주셨으면 좋겠다. 현재 센터 상근변호사가 없어 법률적 대응이 조금 늦어지고 있다. 센터에 상근변호사가 있다면 군인권침해 피해에 대한 법률 대응이 빨라지고 용이해질 것이다. 군인권센터에 후원하는 일이 군인을 지켜주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주시면 더할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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