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결정장애야말로 우리 시대 청년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들 말한다. 이는 올리버 예게스의 <결정장애 세대>로 인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사실 책의 원제는 <Generation Maybe>인데, 이는 원래 <디 벨트>(Welt)라는 일간지에 기고한, 자기 세대를 평가하는 에세이의 제목이었다. 말보로(Marlboro)의 캠페인 문구(Don’t be a Maybe)에서 얻은 아이디어라고 한다.

자신을 규정하는 특징으로 결정장애를 제시하는 것은 어느덧 전세계인들이 공유하는 현상인 듯하다. 널리 유행하고 있는 이 단어는 현대인이 자기 현실을 다시금 규정하게 만들고 있다. 온라인 소통을 살펴보면 많은 이들이 자기 책임에 직면하기보다 외려 이 개념을 떠올리며 자신의 회피를 자신의 개성이나 자신이 속한 세대의 특징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결정장애라는 개념이 그것이 지칭하는 현실을 강화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왕따라는 개념이 외려 왕따 현상을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것과도 유사한 형국이다. 허나 예전에도 왕따가 있었던 것처럼 결정장애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정장애는 근대인 특유의 현상이며, 곤경인 것이다. 대체 근대와 결정장애가 무슨 관계일까?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가 <Heretical Imperative>에서 주장하였듯이 근대는 기존에 주어진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나름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선택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정통과 달리 이단은 다른 교리와 다른 입장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이단은 스스로 선택하는 자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이단의 명령>인 것이다.

한데 선택의 강요는 선택의 장애를 유발한다. 선택의 가능성이 열린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자신의 운명에 관련하여 중대한 선택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종교, 배우자, 거주지 등을 자기가 직접 결정하게 된 것이다. 부정 접두어(in)와 ‘나누다’라는 동사(divide)가 결합한 개인이라는 말 자체가 시사하듯이 개인은 바로 선택의 최종적이고 최소(기초) 단위이다.

하지만 선택의 짐은 무거운 것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늘어날수록 결정의 부담은 커진다. 따라서 선택의 책임을 외면에서 남에게 위임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파시즘을 지지한 것이다. 강력한 지도자에게 모든 선택의 짐을 맡겨버린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에리히 프롬의 잘 알려진 저작의 제목은 정확하게 그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자유는 값비싼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성숙한 시민 주체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시민으로서 합당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그냥 우아하게 교양을 쌓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독일인의 교양 교육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파쇼적 분위기를 막지 못했다. 그보다는 앎과 삶의 간격을 메우는 올바른 인문교육이 필요하다. 이것 말고 달리 지름길이 없다.

지금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탈근대)는 근대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우리에게도 결정장애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인 앞에 열린 선택의 다양성은 근대의 그것을 능가한다. 지금 현대인의 선택을 대신해주는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다. 기업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왜곡하고, 우리의 욕망과 공포를 자극하여 상품을 판매한다.

사교육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의 공교육은 무너지다시피 했다. 모든 공교육은 사교육을 전제로 작동하고 있다. 요새 자녀 교육을 공교육 체제에 떠맡기는 학부형은 선생에게 개념 없는 부모로 낙인찍힌다. 결국 부모로서는 자녀 교육을 위해 사교육의 시스템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요즘 학생들의 교우관계는 학원과 연동되어 있다.

더욱이 모든 교육 관련 정보가 사교육 기업체로부터 양산된다. 가령 외국어 공부는 빠를수록 좋다거나, 중학생 당시 성적이 대학수준을 결정한다거나 등 끝이 없다. 왜곡된 정보로 조작된 감정 때문에 사교육 업체가 내놓는 상품을 학부모는 그대로 소비한다. 불안과 공포가 폭증하기에 부모는 등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이런 정보의 쓰레기장에 달려든다.

사교육 상품의 소비는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녀에게 충분한 사교육을 시켜주기 위해서는 충분한 경제적 역량이 필요하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른 부분을 포기해서라도 사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하나 상대적으로 넉넉한 중산층의 경우에도 수입의 절반 정도를 교육에 투자하는 상황이다. 교육 부분을 제외한 소비 수준은 빈곤층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에듀푸어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사교육의 전횡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들어섰는지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에듀푸어가 결정장애의 극단적 양상이라는 사실에 있다. 학부모의 불안 회로를 건드리는 사교육 담론은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가정경제는 이미 오래 전에 파탄지경이고, 학생들의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온 지도 오래다.

그러니까 선택장애라는 개념은 블로그나 SNS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가볍게 유희적으로 자기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할 개념이 아니다. 가령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까 아니면 짬뽕을 먹을까를 고민할 때에 자조적으로 사용하는 단어 정도로 규정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선택장애는 차라리 실존적 문제다.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보여주는 심각한 징후인 것이다. 에듀푸어 현상은 한국 사회를 이끄는 성인들이 주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 이를 통해서 고통 받는 것은 우리 자신만이 아니다. 우리의 불안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고문 받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의 영달을 위한 왜곡된 교육 투자가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위한 올바른 인생 공부다. 자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삶을 따른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