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혼란한 시리아를 탈출하여 독일로 건너가려다 목숨을 잃고 터키 해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난민 아일란 쿠르디가 유럽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난민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또한 과반수의 독일 유권자들이 난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어 그들의 성숙한 시민 의식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일정 부분 모르쇠로 일관하며 문제를 키워오던 그들이 사진 한 장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탐탁치만은 않다. 쿠르디의 시신이 해변으로 떠밀려오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사진기자의 앵글에 담기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떠들썩한 난민 환영이 가당키나 했을까? 더군다나 유럽은 이미 무슬림과 화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그러니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통한 시리아 난민 러시의 향후 또한 인도주의적일지 지켜볼 일이다.

유럽 사회는 오랫동안 구교의 전통 하에 놓여 있었으며 가톨릭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 견고한 종교 공동체에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균열과 흠집을 내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러한 반유대주의적 정서는 주지하다시피 20세기 세계 대전의 뇌관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이후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은 유럽은 철저한 자기반성을 하였고 심지어 홀로코스트를 부정할 경우 처벌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대 유대교의 갈등은 21세기 가톨릭 대 이슬람교의 갈등으로 불씨가 고스란히 옮겨왔다. 이는 올해 초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에서 보듯이 유럽사회가 직면한 가장 민감한 현안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 국내 출간된 미셸 우엘벡의 <복종>(문학동네 2015)은 이슬람교에 대한 그러한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2022년 프랑스, 극우파인 국민전선이 득세하는 와중에 이슬람박애당이 2위로 치고 올라오며 경합을 벌이게 된다. 극우파에게만은 정권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던 프랑스의 좌파와 중도우파는 차선책으로 이슬람박애당을 지지하고, 이슬람박애당이 승리하면서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여성의 고등교육이 금지되고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등 사회가 이슬람 교리에 맞춰 재편되는 상황에서, 주인공의 혼란도 잠시 그 또한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무조건적 ‘복종’의 안락함에 몸을 맡긴다. 무슬림이 비주류로 내몰리는 현실과 정반대로 무슬림이 곧 주류가 되는 소설의 설정이 보여주는 것은 ‘모 아니면 도’다. 즉 상충되는 두 문화권의 급격한 얽힘 속에서 유럽 사회는 타협과 화해의 지점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질적인 문화 간 충돌은 비단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응준의 장편 소설 <국가의 사생활>(민음사 2009)은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 이후 생지옥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의 풍경을 신랄하게 그리고 있다. 통일 직전 신분과 계급을 모조리 부정당하며 물질만능의 남한 땅에 내던져진 이북 사람들은 공허와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비일비재로 한다.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지하조직으로, 여자들은 윤락업소로 흘러들어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묘사된다. 어지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강력한 마약이 시중에 유통되며, 고의로 주민등록을 거부하고 정부의 추적망을 피해 불법을 자행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대포인간’들이 넘쳐난다. 실제 통일이 되었을 경우 일어남직한 저 끔찍한 상황들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답이 없는 현실은 소설이라는 허구를 거치지 않아도 충분히 넘쳐난다. 통일은 둘째 치고 당장 한국 사회로 유입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문화 정책’이라는 말만 번지르르하고 아무런 효용도 없는 생색내기 정책 정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정부의 빈약한 해법이다. 다문화 가정 2세들이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 받는 일이 점점 많아질 텐데,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다문화’가 욕으로 통용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기도 했다. 외국인 자녀를 보면 “쟤 다문화래”라며 쑥덕인다는 것이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곧 자라날 갈등의 불씨들을 우리 사회가 외면하거나 혹 키우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지금의 유럽보다 더 혼란스러운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 곳이 여기 대한민국일 것이다. 지옥 같은 이 사회의 곁을 낯선 이들과 나눌 채비는커녕 내 몸 하나 간수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국민이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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