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어떤 의미에서 이제 대학은 죽었다. 한때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불리던 대학은 더 이상 진리 탐구의 전당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다.

상아탑의 의미

원래 상아탑(象牙塔, Ivory Tower)은 구약 성경에 들어있는 <아가>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 연원한다.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Your neck is like an ivory tower).” (여기에서 한글 번역은 개역개정판을 사용하였고, 영어 번역은 NIV를 인용하였다) 솔로몬의 작품으로 알려진 아가(雅歌, Song of Songs)는 노래로 연인을 찬미하며, 사랑을 예찬한다.

이후 그 연인의 자리에 성녀 마리아가 놓이게 되었다. 상아탑이 마리아를 가리키는 별명(epithet)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적 은유가 종교적 맥락으로 확장되어 활용된 셈이다. 한데 지금에 와서는 왜 대학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상아탑 속에서 살아가는 학자들이라는 표현으로 잘 드러나듯이 현실로부터 분리된 관념적인 성향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근대 비평의 아버지로 불리는 샤를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Beuve, 1804-1869)가 시인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에 대해 비판할 때에 사용하던 표현(tour d’ivoire)에 연원한다. 비니가 상아탑 안에서 살았다는 그의 언급은 현실 참여적이던 빅토르 위고의 작품 세계와 달리 예술지상주의적이던 그의 작품 성향에 대한 지적인 동시에 낙향하여 고립을 자처한 그의 후반 생애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왜 상아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자 그대로 보면, 상아탑은 상아(象牙), 즉 코끼리의 어금니로 쌓은 탑이다. 간단히 말하면, 코끼리 무덤이다.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선조가 대대로 묻혀있는 무덤에 홀로 찾아가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이 코끼리 무덤에는 상아가 무더기로 쌓여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짓이다. 코끼리는 결코 코끼리무덤에 찾아가 홀로 죽지도 않고, 가족들이 애도하며 주검 근처를 배회한다. 이는 필경 사냥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를 죽이고 상아를 갈취한 밀렵꾼들의 주장에 기인한 것일 터이다. 그 많은 상아 획득의 출처가 코끼리 사냥이 아니라 코끼리 무덤이라는 것이다.

상아가 쌓여 있다는 코끼리무덤 신화의 주장을 염두에 두어야 상아탑의 의미가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코끼리가 무덤에 들어가면 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현실로부터 유리된 장소를 가리키는 다소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은유로 상아탑이 사용되는 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의 상아탑과 대학의 자율성

이러한 부정적 함의를 제외한다면, 근대의 대학은 분명 상아탑이다. 대학과 교수의 자율성이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독일의 근대화를 주도한 독일의 대학이 잘 보여준다. 독일의 교수들은 모두 공무원이고, 국가가 그들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독일이 학문의 강국이 된 것은 특정한 이념에 휘말리지 않도록 순수한 지적 독립을 보장받았던 결과이다.

이러한 독일 대학의 자율성은 학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입학도 자유롭고 학비는 무료이기에 원하면 누구나 대학생이 될 수 있다. 학비를 염려하지 않고 순수한 학문적 관심만으로 공부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고등학교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지 않는다. 뒤늦게 지적 능력이 개화하더라도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학생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원래 교육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가 추구한 근대 대학의 이상을 따른 결과이다. 그의 논고인 <인간교육론>(책세상)을 보면, 국가는 대학에 대한 간섭은 가능한 줄이고 대학에 대한 지원은 가능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 대학이 만들어진다면, 이게 곧 선진 국가를 만드는 든든한 반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동안은 이러한 대학 자율성의 이상이 한국 대학에서도 추구되었다. 이러한 군사 독재정권과의 오랜 싸움은 그러한 자율성에 대한 추구의 강력한 증거이다. 더욱이 한국 사회의 교수에 대한 사회적 존경이 유독 드높았다. 그만큼 기대치가 높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는 대학 교수가 국가를 지도해야 한다는 훔볼트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대학의 기업화

하지만 현재는 이러한 자율성을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의 대학은 오히려 기업을 모델로 삼아서 적극적으로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에 상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한 면으로 기업이 기대하는 연구를 내놓는 것이며, 다른 한 면으로 기업이 요구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다(교육도 상품이고, 학생이 고객이다).

그러니까 대학은 더 이상 상아탑이 아니다. 이제 대학은 기업이 되었다. 최근에 번역 소개된 빌 리딩스 교수의 <폐허의 대학>(책과함께)에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대학이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대학 순위를 매기는 데에 활용되는 수월성의 척도야말로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원서가 출간된 지가 무려 이십여 년이 된 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다.

이는 비단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학의 위계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원래 서울 소재 극소수의 명문대학과 지방 국립대학이라는 이원화 체제가 지방의 균형 발전과도 맞물려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로 그러한 이원화 구도가 급격히 무너졌다. 서울과 지방의 대학 간의 양극화가 극도로 심화되고 있다.

지금은 사실상 거의 모든 우수한 학생이 죄다 서울 소재 대학으로 몰리고 있다. 지방 대학은 신입생을 채우는 것도 문제가 되고 있다. 지방 대학의 교수들은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신입생의 유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다. 이러한 급속한 위계화에 맞추어 사실상 모든 대학이 기업화되고 있다. 지금 대학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교육 상품이다.

교육의 결실은 취업이다. 이제 대학의 존재 의의는 학생들의 취업 알선에 있다. 기업은 대학에게 취업 학원이 되라고 다그치며, 심지어 기업이 인수한 모 대학은 학부에서 회계를 교양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영혼이라도 팔아 취업하려고 한다). 모든 대학이 이렇게 취업을 우선하는 교육 기업이 되었고, 이는 대학의 서열화와 직결된다.

정부의 대학 구조조정 강행

정작 문제는 정부가 이러한 경향을 강제한다는 것이다. 지난 8월 31일에 발표된 대학구조개혁평가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울 소재 주요 대학에 유리한 방향으로 평가가 진행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9월 10일 교육부 국정감사에서까지 교육부의 대학 구조개혁 평가 발표에 대해 문제점이 많다고 비판이 제기될 정도였다.

배재정 국회의원(새정치연합)에 따르면, 4년제 일반대학을 중심으로 볼 때에 수도권 대학 57곳 가운데 20곳이 A등급을 받았고, 지역 대학은 101곳 가운데 14곳만 A등급을 받아서 2.5배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수도권 대학과 구별되는 지역대학의 고유한 역할이 평가 지표에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더욱 힘을 실어준 셈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배 의원에 따르면, 취업에 유리한 학과만 남겨두고 그렇지 못한 학과는 정리하도록 하는 것에 대학구조조정의 목적이 있다. 결국 이로 인해 기초학문과 순수학문이 그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설 자리가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등급을 결정하는 정성평가 항목에서 평가 기준, 내용, 결과가 전부 비공개된 것도 문제라는 점을 지적했다.

실상을 살펴보면, 더욱 서울 소재 대학에 유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구조개혁위원회가 제안한 36개의 평가항목 가운데 교육부는 18개만 받아들였는데, 세부적으로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가령 기숙사 운영 항목의 경우, 수도권 대학의 기숙사 여건이 지방 대학에 비해 미비하기에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평가항목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 본다면, 이번 대학 구조개혁 평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극히 정당하다. 애초에 정부가 이렇게 인위적으로 개입한 것이 문제다. 어차피 대학 생태계는 인구 급감 등의 사회적 구조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조절될 수밖에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야 정상적인 조율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오히려 정부의 이러한 통제로 인해 그러한 자가 조정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고, 왜곡된 서열화만 증폭되고 있다. 사회적 안전망이 두텁게 깔린 복지강국은 대학 간의 차별을 견제한다.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서울과 지역 간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대학의 균형을 고려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서울권에 지원을 집중하고 있으니 상황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다시 상아탑으로

이렇게 정부가 대학의 위계화를 강제하고, 또한 기업이 대학으로 하여금 취업학원의 역할을 하라고 강요하는 상황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며, 또한 대학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다. 정부와 기업이라고 하는 바깥의 적을 비판하는 것으로 대학이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다른 한 측면에는 대학 자신도 들어간다. 대학이 스스로 상아탑의 고고함을 버리고 시장의 흐름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가령 무의미한 영어 수업의 강행이 교수의 연구나 학생의 교육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저 외부의 대학 서열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겠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따라서 대학의 위기와 관련하여 외부에 탓을 돌리기 전에 먼저 내부에서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 대학은 이제 자신의 본령을 되찾아야 한다. 다시 진리의 상아탑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 학자들 또한 다시금 그 상아탑 속에서 살아야 한다. 학자가 시장을 기웃거리는 것부터가 이상한 것이다. 진리는 시장과 타협하지 않는다.

교육 또한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정상적인 대학은 연구, 즉 진리 탐구와 더불어 학생 교육을 수행해야 한다. 대학 교육의 목표는 학생의 취업을 알선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학생을 인재로 양육하는 것에 있다. 새롭게 교양 학부대학(Liberal Arts College)의 이상을 회복해야 한다. 고루하게 들리지만, 이러한 정체성 회복에 대학 정상화의 해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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