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멀리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앞바다 ⓒ전대웅

【투데이신문 박애경 기자】 서귀포는 예술가들의 쉼터이자 안식처 같은 곳이다. 지쳐있는 예술혼을 넉넉한 가슴으로 끌어안고 토닥거린다. 섬사람, 뭍사람 가릴 것 없이 어머니의 품이 되어준다. 섬사람 우성 변시지 선생, 뭍사람 대향 이중섭 선생에게 서귀포는 늘 그러했다.

또한 서귀포는 동시대 예술인들에게 자연이라는 캔버스와 원고지를 아낌없이 내어주기도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가슴을 유희하듯, 그들에게 서귀포는 어머니 젖가슴이다. 해안가 바위틈을 누비는 작은 게들, 밭에서 나른한 오수를 즐기는 늙은 황소, 넓은 초원이 그리워 한껏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한 무리의 말, 그리고 푸르디푸른 바다와 작은 어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이야기까지 작품 속에 녹아내고 어루만진다. 이들의 유희를 탐닉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귀포 칠십리에 위치한 ‘작가의 산책길’이다.

▲ ⓒ안한중

‘작가의 산책길’은 서귀포에 머물며 제주의 색과 서귀포의 삶을 작품으로 남긴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는 4.9㎞의 도보길이다. 지난 2011년 5월 조성된 작가의 산책길은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 거주지▶ 커뮤니티센터(아트하우스)▶ 기당미술관▶ 칠십리시공원▶ 자구리해안▶ 소남머리▶ 서복전시관▶ 소정방▶ 정모시공원▶ 소암기념관을 이어준다.

이 가을, 낙원 같은 서귀포의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예술품들을 음미할 수 있는 ‘작가의 산책길’에 서서 삶의 속도를 늦추고 깊은 호흡 한 번 해보자.

이중섭 미술관

   
▲ 이중섭 거주지 ⓒ안한중

이중섭에게 서귀포는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 당시 신접살림을 차렸던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1915년 1월부터 12월까지 11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다. 비록 한 평 남짓한 좁은 집에서 곤궁한 시절을 보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이 함께여서 행복했다. 그리고 그는 이 행복한 시간을 화폭에 따뜻하고 명랑하게 담아냈다.

대표적인 작품이 <길 떠나는 가족>이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고 있고, 소를 모는 남자는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있다. 오광수 미술평론가는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지상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다”라며 이중섭에게 서귀포는 유토피아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한다.

   
▲ 이중섭 미술관 앞 동상 ⓒ전대웅

또한 서귀포에서 만났던 섬, 게, 물고기, 아이들, 가족 등의 소재는 이중섭을 대표하는 <은지화(銀紙畵)>뿐만 아니라 서귀포를 떠난 후 남긴 유화나 드로잉에도 자주 등장한다.

현재 미술관은 이중섭의 은지화 9점, 엽서화 4점, 유화 1점과 함께 그의 아내 이남덕 (마사코)여사가 일본에 있는 친정으로 보낸 미공개 편지를 전시하고 있다. 한국전쟁 중 가족을 그리워했던 이남덕 여사의 간절함을 엿볼 수 있다.

기당미술관

▲ 기당미술관 ⓒ전대웅

이중섭 미술관과 그가 잠시 머물다간 소박한 거주지를 둘러본 후 우리나라 최초 사립미술관인 기당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매봉 기슭에 자리 잡은 기당미술관은 1987년 7월 1일 재일동포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고향 서귀포를 위하여 건립 기증했다.

주요 국내외 작가들의 현대미술작품 650여점을 소장하고 전시함으로써 풍성한 문화의 향유를 누리게 해준다. 현재 ‘폭풍의 화가’로 불리는 우성(宇城) 변시지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 기당미술관에 전시중인 변시지 선생의 작품들 ⓒ전대웅

‘황토빛 제주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인 화가 변시지의 작품에는 바람에 쓰러질 듯 서있는 제주의 초가집과 쓸쓸한 소나무,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는 조랑말, 그리고 작은 돛단배가 빛과 함께 화폭을 지배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곳곳에 배어있는 작가의 고독과 연민을 읽을 수 있다.

칠십리 시(詩)공원

▲ 칠십리 시공원 ⓒ안한중

기당미술관이 자리한 삼매봉의 입구에서 절벽을 따라 조성된 시(詩) 공원에 늘어선 시비와 노래비가 가을 산책길을 반긴다. 특히 공원 2곳에 마련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천지연폭포와 서귀포항의 아름다움은 여행자에게 또 하나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공원 내에는 마우로 스타치올리(이탈리아), 레오나르 라치타(프랑스), 카스토 솔라노(스페인) 등 3명의 해외작가와 엄태정, 조성묵 등의 국내작가들의 조형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그야말로 ‘지붕 없는 미술관’이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제주 그리고 서귀포의 자연과 생명을 상징화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예술 섬으로서의 성숙을 기대했다.

▲ 칠십리 시공원 내 시비 ⓒ전대웅

문학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칠십리 시공원에서의 산책은 온전히 나만의 가을을 즐기며 사색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시간이 된다.

자구리해안과 소암기념관

이어지는 자구리해안 문화공원과 서복전시관, 그리고 소암기념관 역시 산책길 동무가 되어준다. 

   
▲ 자구리해안 ⓒ전대웅

<게와 아이들-그리다>, <실크로드-바람길> 등 작가의 산책길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는 자구리해안은 섶섬이 고고히 서있는 서귀포 앞바다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시민들의 쉼터이다.

▲ 서복전시관 ⓒ안한중

서복전시관은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유래를 알려주고자 정방폭포 인근에 마련된 전시관이다.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서불(徐市), 곧 서복이 영주산(한라산) 불로초를 구한 후 서귀포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서쪽으로 돌아가는 포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 서복상을 비롯한 몇 가지 자료만이 전시관은 채우고 있어 다소 허전해 보이지만, 정방폭포와 해안을 이어주는 산책길은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 소암기념관 ⓒ전대웅

산책길은 소암기념관에서 멈춘다. 소암기념관은 한국 서예의 거장인 소암 현중화 선생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기 위해 2008년 10월 개관했다. 서귀포에서 출생한 소암 선생은 생전에 “한라산을 수없이 넘나들면서 눈에 포착되는 나뭇가지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소암 선생의 예술은 자연과의 소통과 일치라 할 수 있다. 그 자연이 곧 천혜의 서귀포, 어머니 서귀포라 하겠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