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어떻게 먹을 것인가. 인류가 수렵과 채집을 하던 때부터 내려온 고민이다.

숲에서 빈 손으로 돌아오면 어제 남긴 부실한 먹거리를 부족민들이 나눠 먹어야 한다. 이 때 누군가가 재료를 한 데 끓여 양분을 우려내고 양을 불려 주면, 비로소 모두의 배가 공평하게 채워지고 공동체엔 평화가 온다. 요리방법은 종종 그렇게 생존전략이 되곤 한다.

온갖 재화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도 비슷한 고민은 이어진다. 가난한 청년은 새우깡을 뜨거운 물에 풀어 새우죽 한 끼를 만들고, 살아남기 급급한 식당은 값싼 조미료로 음식의 맛과 양을 유지하며 버틴다. 요컨대, 요리 레시피는 일종의 ‘생존 레시피’이며, 생존이 갈급할수록 더욱 전략화 된다. 그래서 자본의 정글 속을 헤매는 현대인에게 요리는 점차 경제적 전략이 필요한 분야가 되고 있다.

요즘의 예능화된 요리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겪는 곤란의 실체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KBS2TV <해피투게더 시즌3 - 야간매점> 은 최소한의 돈과 시간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방법을 두고 경쟁한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한 발 더 나아가, 어떤 수준의 재료로든 단 15분만에 고급 식당에서나 보던 음식이 가능함을 증명한다.

이 방송들은 고립 된 개인, 피곤에 찌든 짧은 밤, 얇은 지갑이라는 삼각파도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돈과 시간의 레시피를 알려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등장이 이루어졌다. 그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선보인 ‘고급지게 보이는 요리’들은 재미를 넘어 현실과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인간은 지방, 염분, 당 등에 유독 강렬한 갈증을 느낀다. 때문에 윤택한 식단은 욕망의 출구지만, 부족한 돈과 시간이 자주 그 욕망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편의점에 넘쳐나는 저렴한 씹을 거리와 음료의 대부분이 위의 몇가지 맛에 집중된다. 이런 현실에서 거리의 식당들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손님들을 상대로 느끼하고 짜고 단 음식을 1분만에 내 놔야 한다. 집에서의 한끼 식사조차 어려운 요즘, 비용과 맛의 균형점을 찾는 것은 우리사회 요식업자의 과제이자 책무가 됐다.

백종원이 각광받는 것은 이의 해결에 꽤 성공한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동안 식당 자영업의 생존에 몰두했고, 돈과 시간과 맛의 접촉면을 최대한 밀착시켜 이익을 내왔다. 요리가 시각적 탐미의 대상이 되고 요리사가 섭식의 철학자로 자리매김 하는 최근의 주방 순혈주의 풍토에선 그가 단지 사업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하는 비용과 얻어지는 포만감 사이의 균형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그의 다양한 모색은 원시공동체의 셰프가 생존레시피를 궁리하던 것과 닮았다. 가용재화와 끼니의 방정식을 풀어왔던 전통적 셰프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음식이 식당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그는 음식의 레시피를 위한 레시피, 즉 식당의 ‘생존 레시피’를 연구한 셰프인 셈이다. 따라서 그가 애용하는 설탕은 생존이라는 명분 위에서 시청자들에게 뚜렷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음식들은 각 가정의 경제적 위축을 반영하며 오늘날 집밥으로서의 지위마저 얻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극단적인 저비용 요리 레시피의 인기는 과거의 생존 레시피들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21세기의 세상은 실시간으로 연결 되어있고, 단 1초의 가치조차 계량화된다. 따라서 20세기의 불편함이 선사해주던 여유를 어쩔 수 없는 매몰비용으로 용인해 줄 틈이 없다. 그 결과 우리는 더 부지런해졌지만, 성과는 예전만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걸맞지 않는 레시피의 사례는 여기저기에 널렸다.

국내 3대 연예기획사인 SM, JYP, YG는 시대가 변하던 90년대 무렵 새로운 레시피로 성공했지만, 가수가 꿈인 아이들은 기획사 시스템의 레드오션에 뛰어들어 기약 없는 경쟁을 한다. 성적과 교우관계가 청소년의 자살 원인 1,2위를 다툰지 오래 됐어도, 어른들은 과거의 고도성장을 이끈 교육정책에 대한 기억에 매달려 학생들의 바른 성장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진보세력은 민주화에 기여했지만 시민들이 생존 레시피에 골몰 할 때 저항의 레시피를 설득하다 외면 받았고, 보수정권은 수 십년 된 과거의 레시피를 들고 나왔지만 많은 분야에서 능력부족을 넘어 사회를 퇴행시키고 있다.

모두가 무언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달라지는 것은 미미하다. 급기야 노력해도 소용없는 사회라는 자조마저 넘친다.

도무지 활로가 없어 보이는 이 막막함의 진짜 원인은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방향성이다. 노력의 기준이 과거의 자오선에 맞춰져 있어서 지금의 방위와 맞지 않기에 생기는 문제다. 과거에 믿어왔던 거의 모든 방법론들로부터 배신 당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검증된 생존 레시피가 아니라 레시피를 개발할 줄 아는 감각이다.

좋은 음식을 만들려면 모든 재료들이 저마다의 맛과 영양을 잘 뿜어내도록 요리해야 한다. 그러나 집마다 부엌이 다 다르게 생겼고, 기구들도 제 각각이다. 심지어 각자 구입할 수 있는 식재료들은 천양지차다. 그러므로 TVN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이 늘 상황에 맞춰 레시피를 떠올릴 줄 알아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은, 성공한 식당 자영업자의 경험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먹을 거리가 부족한 집단은 대개 세가지 길을 걷는다.

첫째가 공평한 식사의 기회 추구다. 대한민국에서 연예계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비교적 정당한 대가로 돌려받을 수 있는 몇 안 남은 통로로 인식된다. 그래서 시청자는 젊은 요리사의 인기 뒤에 있을지 모를 부모의 힘을 경계하고, 약속을 어기고 제 살 길만 쏙 찾아먹은 대중가수의 복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대중이 정치인 보다 방송인을 더 크게 비난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열려있는 공평한 기회가 부정한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함이다.

둘째로는 불공평한 현실의 괴로움을 관리하는 길이다. 의도야 어찌됐건 현재의 힐링산업이란, 유력한 생존레시피를 생산하지 못하는 집단이 스트레스의 임계점에서 보여주는 현상이다. 스스로 느끼는 괴로움의 민낯을 받아들여 다소간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고통분쇄 레시피를 사용하는 분야다.

최근 우리사회는 위의 두가지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세번째 길인 생존레시피를 개발하는 것에는 발 빠르지 못하다. 남이 만든 레시피를 따라가는 데엔 익숙하지만 정작 자기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데엔 취약하다.

故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언급하자 국내에 갑작스러운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그 결과 인문학을 아무 음식에나 넣어도 풍미를 돋을 수 있는 향신료처럼 소모하거나, 몇몇 인문학자들은 힐링산업에 가져다 썼다. 그러나 제대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가 인문학을 재료로 선택한 ‘레시피 개발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진정 다뤄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다양한 레시피 개발자를 키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수퍼 레시피란 없다. 이제 옛 경험에 의존하는 과거의 레시피에 대해 종말을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신 레시피 개발자를 키울 때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