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우리에게 서정시 「로렐라이」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본색은 꼭 서정적이지만은 않다. 그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서정성은 표면적으로는 사촌 아말리에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인을 꼽는다면, 아마도 젊은 나이에 독일을 떠나 생을 마칠 때까지 프랑스 파리에 묶여 지내며 갖게 된 향수(鄕愁)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가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한 연모가 클수록 그것이 변질되는데 대한 애정 어린 고언(苦言) 또한 혹독해지는 법인데 하이네의 문학이 그러하다. 그래서 하이네의 서정성은 그의 현실 비판이 띠는 빛깔 정도로 여겨도 무방할 것이다.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네는 문필가로서 일찍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좀 더 돈이 벌리는 직업을 가지기를 바랐다. 학교를 중퇴하고 친척이 운영하는 은행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는 한편 재정 지원을 받아 작은 사업을 꾸리기도 하지만 금세 파산한다. 사업 체질과 거리가 멀었던 하이네는 이번에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고 학업을 마친 뒤 변호사 일자리를 얻기 위해 전전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한다. 이러한 반 강제적인 인생행로의 와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던 그의 글들은 호평을 받아왔다. 그러나 급진적이고 정치 비판적 색채가 강한 그의 글은 교수직 자리를 거부당하게 하는 등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1830년대의 독일은 하이네 같은 재능 있는 젊은이가 가능성을 펼치기에는 보수적이고 꽉 막혀 있었는데 그 사회적 면면이 우리네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같은 시기 프랑스 파리는 혁명의 열기로 뜨거웠다. 시민들은 귀족이나 사제와 같은 수구세력과 맞서 싸워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는데 고무되어 있었고 그만큼 그곳에서는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되었다. 하이네는 파리로 건너가 그곳의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문화 및 사상을 독일에 알리는 통신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독일은 보수층의 득세로 폐색만 짙어가고 급기야 하이네의 글들을 금서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는 경색된 조국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구체제를 연명하며 권세를 누리려는 조국의 권력자들을 곰팡내 나는 ‘해골’로 비하하는가 하면,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사람도 태운다”는, 마치 나치의 분서갱유와 유대인 학살을 예언하는 듯한 말을 던지기도 하였다.

자신의 가능성을 옥죄는 조국을 박차고 떠난 하이네의 결단은 ‘탈조선’을 희구하는 요즘 청춘들의 심성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타국에서도 조국을 향한 애정과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하이네와 달리 이 ‘헬조선’주의자들에게는 아껴둘 애정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하이네가 독일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리워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이 그의 조국 Vaterland인 동시에 모국 Mutterland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릇된 질서와 의무를 강요하는 조국은 혐오하고 벗어나야 할 대상이지만,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모국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듯이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가 프랑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숨통이 트이다가도 때때로 그 가벼운 공기에 질식해 독일 특유의 공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러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의무만 강요할 뿐 그에 상응하는 권리와 혜택에는 인색한 헬조선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저 ‘조국’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우려할 정도로 이 땅의 청춘들이 국가에 대한 애정을 완전히 상실한 데는 단순히 의무로서의 조국뿐만 아니라 심정적 고향인 모국까지도 사실상 망실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운이 좋아 탈조선을 하더라도 무시로 그리워할 만한 문화적 전통이나 공동체적 감각 같은 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부식되어 왔다. 국가적·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역도 딱히 구성원들을 위해 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애초에 더 잃을 것이 없는 곳을 훌쩍 떠난들 그 누구도 아쉽지가 않은 것이다. 탈조선을 하지 못해 헬조선을 외치는 이들을 다그치는 기성세대의 목소리가 공허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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