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햄릿과 유령
[칼럼] 햄릿과 유령
  • 이은지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12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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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신들의 복잡한 가정사로 뒤얽힌 그리스 신화에는 아버지에 대적하는 아들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남편인 우라노스가 자식들을 자궁에 가둬놓고 핍박하자 이를 참다못한 막내아들 크로노스는 아버지의 거시기를 낫으로 쑹덩 잘라내 영원히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다.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권좌에 오른 크로노스 또한 무려 10년씩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자신의 막내아들인 제우스에게 자리를 내놓게 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부모세대와 자식세대간의 반목은 사회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신경증이 생긴다고 분석하고 있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다루는 이야기 중 그리스 신화 못지않게 오랜 것을 꼽으라면 단연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어머니는 그의 숙부 클로디우스와 재혼을 하게 된다. 햄릿은 아버지를 떠나보낸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혼령이 햄릿을 찾아와 자신의 죽음은 클로디우스의 계략에 의한 것임을 알려주는 한편, 자신을 대신하여 햄릿이 숙부에게 복수해줄 것을 부탁한다. 안 그래도 숙부가 탐탁치 않았던 햄릿은 혼령의 말을 전해 듣고 분노하며 복수를 다짐한다.

햄릿은 자신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실성한 연기를 하여 모두를 헷갈리게 하면서 치밀하고 교묘하게 복수극을 준비해 나간다. 단순히 아버지 혼령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느 때고 기회만 되면 숙부의 목을 칠 수도 있을 텐데, 햄릿은 그리 간단히 복수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는 왕궁에 극단을 불러들인 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재혼한 숙부의 이야기와 유사한 ‘곤자고의 암살’이라는 작품을 왕과 왕비 앞에서 상연하도록 한다. 연극을 관람한 클로디어스는 자신의 파렴치한 만행이 무대 위에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숙부가 자신의 만행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고통을 겪게 했으니 이제는 미련 없이 그를 살해해도 될 텐데, 햄릿은 그러지 않는다. 햄릿은 몰래 칼을 뽑아 들었으나 숙부가 자신의 범죄를 후회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칼을 거둔다. 그가 회개하는 순간 목숨을 빼앗아 천국으로 가게 할 수는 없으니 좀 더 끔찍한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햄릿이 단순히 위의 이유만으로 복수를 미루는 것은 아닌 듯한 장치들이 숨어 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자마자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를 시종일관 음탕한 여자로 몰아세우고 비난하는데, 이는 어머니를 향한 햄릿의 욕망이 거꾸로 표현된 것이라는 게 프로이트의 설명이다. 따라서 근친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주고 있는 숙부를 서둘러 처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거북한 해석일 수 있으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경우 햄릿과 아버지 혼령이 만나는 장면을 새로이 조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혼령은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숙부를 처치해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절대 어머니에게는 악의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햄릿의 욕망을 기정사실로 친다면, 어쩌면 혼령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마음속의 목소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해 그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인 동시에 햄릿 자신의 목소리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내면에 아버지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착하게 살아라” 혹은 “거짓말하지 말아라”는 것처럼 양심의 정언 명령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바로 그 예이다. 햄릿과 조우한 혼령은 그러한 내면의 양심과 자신의 욕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형상인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에 숙부와 그 일당들을 모조리 살해하며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긴 하지만, 정작 치밀하게 계획된 순간에는 미루었다가 우연한 계기에서야 행한 복수라는 점에서 절반은 실패한 것이다.

우리 내면에 작동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대부분 국가의 목소리이기도 하며, 이는 지난 시절 꽤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 왔다.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 나라에 이바지하자는 목소리에 모두들 순진한 일개미처럼 응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국가의 목소리가 더는 순수하게 들리지 않아 넋 놓고 따르기 망설여지는 순간들이 잦아지면서 그런 시절은 점점 과거로 떠밀려가고 있다. 최근에는 노동개혁 아닌 노동개혁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말로는 노동시장을 개선하여 경제에 순기능을 가하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경제를 경색시키는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정부의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혼령의 그것처럼 그리 순수하지만은 않은 국가의 목소리 앞에서 우리 또한 햄릿처럼 망설이고 주저하는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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