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40년간 권력과 돈을 독점했던,이른바 TK천하시대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다.

재야학자로 알려진 리영희 교수는 <한겨레>의 1998년 1월17일자 칼럼에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두고 4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전라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벽 즉 전라도 출신이라는 벽에 막혀 기를 못 펴고 살다가 갑자기 그 벽이 허물어진 형국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전라도 출신들은 지난 40년간 대한민국에서 3등 국민의 처지였고, 내국식민지의 멸시를 당해야만 했다고 썼다. 정말 그랬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전라도 사람 모두에게 지금까지의 영남정권에 의해 짓눌린 맺힌 한을 모두 풀어주는 신비한 특효약과 같은 것이었다.

5.16 이후 경상도 사람들이 요직을 독차지하고, 국가의 재원을 선택적으로 투입해 누릴 수 있었던 온갖 특혜로부터 사실 전라도는 소외된 지역이었고 전라도 사람들은 남모를 눈물과 한숨을 가슴속 깊이 지낸 채 지난 40년을 김대중과 함께 인고의 세월을 보내어야 만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도가 김대중에게 보여준 지지는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나올 법한 지지율이었다.

매번 선거 때마다 반복된 선거실패는 결국 전라도 사람들을 ‘이번에야말로 꼭’하는 식으로 뭉치게 했고 결국 좌파지도자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대한민국 정치사의 이변을 가져왔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전라도 사람들은 평생에 맺힌 한을 모두 푸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대한민국 최초 좌파정권의 등장

사실 김대중에 대한 당시 대한민국 보수층들의 우려섞인 견해는 한마디로 그가 ‘빨갱이’ 라는 것이다.

보수논객으로 유명한 조갑제는 자신이 저술한 ‘김대중의 정체’에서 김대중은 해방직후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 및 공산당계열 행동조직 민청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을 시작으로, 1949년 2월경 남로당 지하당원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는 등 한창 젊었을 때 좌익행동 대원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대통령 당선 직후 국정원을 시켜 김정일 정권의 대남공작 및 국제범죄계좌로 4억5000만달러를 불법 송금한 사실이 있고, 김대중 자신은 부인하고 있으나 북한에서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서기인 황장엽씨의 말을 인용해 “김일성이 김대중에게 두 군데로 돈을 주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좌익 혐의 혹은 친북적인 성향을 노골적으로 가진 김대중의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의 당선은 그야말로 한국정치뿐만이 아니라 당시 세계적인 빅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김대중의 집권성공은 향후 그의 집권기간 내내 좌파적인 성격의 각종 정책이 시행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념의 편견을 딛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게

좌익적 과거행적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을 선택한 당시 한국유권자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IMF라는 외환위기 속에서 한국민들은 이념논쟁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가질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절박했다.

당장 나와 내가족이 길거리로 나앉고 굶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상황에서 국가지도자가 우편향이든 좌편향이든 그것은 호사가들의 가십거리였을 뿐 민초들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김영삼정권에 의해 거의 나라가 결단이 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에 대한 국민적인 분노가 당시 사회분위기를 압도했다.

김영삼정부의 실패는 김대중의 집권을 결정적으로 돕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대중의 정계은퇴선언 후 다시금 정계복귀를 하도록 한 동인 또한 김영삼정권의 철저한 정책실패에 기인하고 있다.

평생 정치적인 동지로 숙적으로 살아 온 두 김씨 이기에 국민들에게도 한번쯤 김대중도 대통령 한번 시켜보자는 동정심리가 상당히 작용했다.

정작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김대중의 각종 정책은 좌파편향적인 정책이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조심스러운 행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은 취임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고통을 요구받고 있다. 잘못은 지도층이 저질러 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길 없으며 이런 파탄의 책임은 장래를 위해서라도 국민 앞에 마땅히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중의 국민의정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발등의 불이 돼 있는 IMF구제금융사태를 풀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1998년 초 한국의 외채는 총 1500억달러로 국민총생산의 37%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1996년까지 7~9%에 이르던 경제성장률은 1998년 마이너스 7%대로 곤두박질 쳤다. 2~3%의 실업률은 9%대로 치솟았다.

미국의 ‘워싱턴 프스트’지 1998년 5월 16자에는 당시 한국인 중 평균 25명이 하루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 IMF형 생계형 범죄가 급증했다. 온 나라가 IMF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돼가고 있었다.

경제란 분위기라고 했다. 국가도산사태는 국민들에게 공포로 다가왔고 줄도산이 이어졌다. 실질 국민소득은 1991년도 6000달러 수준으로 곤두박질 쳤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시간들이었다.

IMF 국가부도사태는 그동안 성장제일주의를 표방해온 경제를 잘 안다는 보수정권이 저지르고, 그 수습은 좌파정권이 해야만 하는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됐다.

후일 경제 대통령이라고 동네방네 떠들던 이명박이 정작 대통령이 된 후 국책사업이랍시고 4대강 삽질하느라 수십조를 강바닥에 쏟아 붙고, 해외자원개발 한답시고 천문학적인 국고를 탕진하는 등 결국 국민들만 골병들게 하고 국가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과 어쩌면 이리도 닮은꼴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나 보다. 깨어있지 않은 민족에게 어리석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국민들의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후일 역사가 이처럼 보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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