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얼마 전 서점에 들렀다가 시집 코너에 떡하니 놓여 있는 두툼한 시집을 보았는데 이름 하여 『시밤』이었다. SNS에 올린 시들을 엮어낸 것으로 ‘시 읽는 밤’의 줄임말이란다. 재치 있는 제목에 눈길이 가고, 일본의 하이쿠를 연상하는 짧은 시들을 큼직하고 예쁘게 인쇄해놓아 손길이 가고, 웃음이 나오고 무릎을 절로 치게 하는 문장들이 종잇장을 거푸 넘기게 하는 매력이 있는 시집이었다. 저자의 이력 또한 “시팔이, 시 잉여 송라이터, 센스머신, 시POP 가수” 등 ‘시인’이라는 두 음절은 지루하다는 듯 퍽 감각적으로 풀이하여 놓았다.

시 몇 편을 일별해보자면 “도레미파솔로시죠?”, “안 자면 이리 와./좀 안자.”, “진심 전하기/진심 힘들긔” 등등 주로 사랑과 결부된 이치나 감정들을 소소한 언어유희를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리가 SNS에 일상적으로 쓸 법한 글귀들이다. 그런데 저 유쾌하고 기발한 ‘멘션’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를 ‘읽는’ 것이라기보다는 시를 ‘보는’ 것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참을 수 없이 짧은 시들은 책장을 펼치는 순간 여지없이 한 눈에 들어올 뿐만 아니라, 최신가요의 가사나 예능프로 자막처럼 직관적인 문장들 일색이어서 보는 순간 바로 뇌리에 탁, 박히는 것이다. ‘시 읽는 밤’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그의 시는 그냥 눈에 보인다. 『시밤』을 ‘시 읽는 밤’의 줄임말이 아니라 ‘읽는’ 행위가 소거된 ‘시’로 풀이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소위 “SNS 스타 작가” 최대호의 『읽어보시집』도 비슷한 경우이다. 알록달록한 삽화가 시선을 사로잡는 와중에 손글씨로 눌러 쓴 문장들이 어딘가 친근감을 주고 있다. “모든 여자 마음의 자물쇠는 다르지만/그걸 여는 열쇠는 하나다./“예뻐요!””(「열쇠」)라는 시구와 함께 “예뻐요”라는 문장에 ‘심쿵’ 당하는 여자의 삽화가 그려져 있는 식이다. 좀 더 발칙한 제목의 『이 시 봐라』나 『너도 써봐라』 등도 같은 양상으로 제책된 시집들인 모양이다. 최대호의 시 또한 하상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읽는’ 시라기보다는 ‘보는’ 시에 가깝다.

창비 시선집이나 문지 시선집의 기나긴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이 땅에 시인이 참 많구나, 그들은 무순이 자라나듯이 쑥쑥 시를 써내는데 나는 그 중 몇 편도 제대로 읽지를 못하는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고는 한다. 일단 그들의 시는 읽기에 난해한 편이다. 난해함을 공통의 상수로 놓고 보니 누가 잘 쓰고 누가 못 썼는지를 가리는 것조차 난해하다. 심지어 그들은 사실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세계를 쓰고 있는 것이므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점조차, 난해하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어떤 시들을 읽다보면, 저잣거리를 헤매다가 한 번 지나치면 다시는 제대로 찾지 못할 진귀한 가게를 발견한 것 같은 이상한 흥분과 희열을 경험하기도 한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경험에 대한 정의가 아닐는지? 단박에 들어오는 인상만을 전하는 것이 시가 될 수는 없어 보인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인스턴트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유종호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시를 읽는 것은 취향의 역사와 함께 문학사를 읽는 것”이라는 통찰을 전하고 있다. 즉 시는 당대의 문화사와 문학사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삶을 진중하게 포착하고는 있으나 상대적으로 난해하여 두루 읽히지 않는 순수문학계의 시들과, 밝고 재치가 넘치지만 일상의 찰나적인 깨달음 너머는 미처 적시하지 못하는 SNS계의 시들이 양립하는 오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는 비슷한 구도를 곳곳에서 목도한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외국문학 대 협소하고 재미없는 한국문학,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상업영화 대 저예산에 담백한 독립영화, 황금시간대에 빵빵한 라인업으로 주목받는 예능프로 대 인기 없는 시간대에 간신히 상영되는 교양프로 등등.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문학 혹은 문화가 이처럼 비슷한 양상으로 소비되는 모습에는 어떤 불편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가볍고 현란하고 즐거운 것들을 ‘소비’하는 동안 소비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것들은 점점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 좀 무겁고 불편하고 어렵지만 바로 그렇기에 모종의 진실을 역설하는 것들과 부딪치고 씨름하는 능력을 그만큼 잃어가고 있다는 것. 시집보다 『읽어보시집』이 더 잘 팔리는데는 이 사회의 중추가 되어버린 저 씁쓸한 역학이 꽤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온갖 화려한 상품들 사이로 정작 소중한 것들은 모래처럼 소리 없이 빠져나가고 있다... 그 소리 없음이 나는 좀 슬프다. 당신도 슬픈가?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