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교육부가 위험한 선택을 하고 있다. 인문계 정원을 감축하는 대학들을 대상으로 내년에 20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한다. 대학 바깥에서는 여전히 인문학을 소비하는데, 아직도 그 열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세상은 인문학의 필요를 인정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인문학을 없애려고, 아니 줄이려고 안달이다. 아마도 취업률이 판단의 기준인 듯하다.

대학교 안에서 경영학과나 이공계열 등 현재 취업이 잘 되는 학과나 계열의 비중을 늘리면 청년 취업률이 상승할 것이라는 것이 교육부의 기대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접근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대학교의 인문학 계열을 감축하면, 대학교 졸업생의 취업률이 증가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는 애초에 취업의 책임 소재를 잘못 잡고 있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라는 묵직한 연구서적의 서문 초두에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의 관계를 질문한다. 이어서는 내놓은 그의 답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인문계 감축과 취업률 증가 또한 마찬가지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취업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대학이 아니라 기업의 몫이기 때문이다.

취업은 기업의 책임이다

취업률을 늘리려면, 기업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기업이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다면, 취업률이 늘어날 수가 없다. 학과를 대대적으로 개편한다고 취업률 자체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 정부는 대학이 아니라 기업을 상대로 청년 고용을 독촉해야 옳다. 심지어 임금 피크제까지 시행하고 있지 않는가. 더욱 강력하게 기업에 요구해야 한다.

애초에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생각하는 기업의 논리를 정부가 적극 수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전에 지적한 것처럼, 대학은 취업 학원이 아니라 진리의 상아탑이다). 어차피 모든 대졸자는 기업에 오면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근로자의 노동에 기반하여 유지되는 기업체의 역할이다. 일자리 창출을 학교에 떠맡기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같다.

기업이 대학에 취업 교육을 떠맡기는 것은 책임 방기다. 회사를 위한 인력 재생산 비용을 대학과 청년(의 가족)에 떠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미래를 위해서는 창조적인 인재가 필요하고, 대학은 바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당장 기업에서 요구하는 기술 훈련보다 더욱 중요한 지적 훈련을 제공해주어야 대학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교육은 대학의 책임이다

물론 이러한 왜곡된 외주는 대학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교육은 대학의 핵심 역량에 해당한다. 교수 양성도 마찬가지이다. 한데 국내 대학은 자국의 교수 요원 양성을 외국(주로 미국)에 떠넘기고 있다. 이러한 아웃소싱은 대학 경쟁력을 저하시킬 뿐이다. 우리가 경쟁하는 일본이나 우리가 모방하는 미국의 경우, 거의 모든 교수요원을 자국 대학에서 충원한다.

조직의 핵심 역량에 해당하는 업무를 아웃소싱하는 것은 그 조직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기업도 그러하다. 특정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 교육은 사내에서 직접 시행해야 한다. 이것은 업무 자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공유함으로써 해결하면 된다. 대학의 고등교육이 정상적으로 시행된다면, 이러한 관리와 공유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대학을 다그치며 청년을 쥐어짠다. 많은 기업이 운영하는 인턴제도 그런 용도로 활용된다. 업무 교육과 경력 제공을 빌미로 무급이거나 혹은 식비와 교통비 정도의 소액 제공으로 가름하기 일쑤이다(미국 기업의 인턴 처우와는 도대체 비교할 수가 없다). 심지어 공모전 부상으로 인턴직 보장을 내거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학이 휘말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대학의 본령에 해당하는 진리 탐구와 시민 교육의 기반이 해체될 것이다. 고대 폴리스에서 교양 교육의 의미는 시민 육성이었다. 아고라에서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 우뚝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양 교육인 것이다. 대학은 바로 이러한 임무를 계승한다.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근시안적 선택

하지만 지금 대학, 정부, 기업 모두가 이러한 대학의 사명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당장의 경제적 이윤으로 보상되지 않는 순수학문(인문학, 자연과학)을 박대한다. 이윤 창출이라는 실용적 목적이 아니라 진리 탐구라는 추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 대신에 경영학 전공에 인원을 몰아주고, 물리학 대신에 의학에 재정을 투입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한 명의 업적이 만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구조가 아니라 만 명의 노력이 한 명의 업적을 탄생시키는 구조이다. 다들 학수고대하는 노벨상도 소수 엘리트의 지원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지원을 장기간 시행해야 기대할 수가 있다. 4대강 사업에 퍼부은 재정에서 반의반만 할애하여 순수학문 연구에 할애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대학은 정부와 기업의 친기업적 구조조정 요구에 소극적으로 순응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업이자 취업학원으로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발맞추어 영어 실력을 강조하고, 회계를 교양 필수로 요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교수 요원 육성의 임무를 저버리고 외국 대학, 특히 미국 대학에 이를 떠맡기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대학을 운영할 거라면, 대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장 13절) 대학이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취업 학원이 아니라 다시 진리의 상아탑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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