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이랑 기자

【투데이신문 임이랑 기자】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제일 먼저 떠오는 직업군이 연예인과 정치인일 것이다.

이들은 잠시라도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정작 대중의 관심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부산시민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부산합동양조의 막걸리 ‘생탁’ 파업이다. ‘생탁’ 파업은 오늘로 549일차이다. 파업이 길어지고 있어서 그럴까? 처음에는 엄청난 관심을 받던 ‘생탁’ 파업이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고 있다.

더욱이 ‘생탁’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알리기 위해 부산시청 앞 광고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부산합동양조 현장위원회 총무부장 송복남(54)씨와 한남교통분회 소속으로 택시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조합원 심정보(52)씨는 200일 가까이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송복남 총무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답답함을 토로했다. 500일이 넘도록 파업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측은 대화의 창구를 닫아버렸으며 부산지역 일반노조도 ‘생탁’ 파업이 장기화 되자 투쟁의 동력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한다.

송 부장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 걱정과 함께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중의 관심이 사라져 버린 15m의 높은 광고판은 송 부장과 심 조합원을 200일 가까이 가둬버린 하늘 감옥이 돼버렸다.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은 있었다.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은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쳤고 이는 일본의 지배에 놓인 조선의 경제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931년 평양에 위치한 한 고무공장의 사장은 노동자에게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고무공장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당시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자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임금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의 여성노동자는 그 절반인 1/4를 받고 15시간의 고강도 노동을 했다.

49명의 고무공장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을 벌였지만 사장은 이들을 해고하고 일본경찰을 불러 파업을 분쇄했다. 이에 당시 31살 여성노동자인 강주룡은 평양의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고공농성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언론은 여성노동자인 강주룡의 고공농성 상황을 대서특필했다.

12m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에 9시간 이상 있던 강주룡의 노력에 의해 1개월 만에 회사는 노동자에게 종전의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고 파업은 종료가 됐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생탁’ 파업으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들은 일제강점기 시기보다 2배 정도 더 높은 광고판에서 6개월이 넘도록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언론도 더 이상 이들의 고공농성은 취재할 게 없다고 관심을 꺼버렸다.

이들이 유일하게 믿고 자신들의 지지자가 되어줄 거라 생각한 국민들도 이젠 관심이 뚝 끊겼다.

더욱이 하늘 감옥에 갇혀 버린 그들은 ‘언젠가 한 번은 국민이 우리를 다시 쳐다봐 주겠지’라는 믿음으로 기약 없는 국민의 관심을 학수고대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기보다 모든 것이 훨씬 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15m 광고판에 올라가 있는 이들에겐 어쩌면 강주룡이 살았던 시기보다 못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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