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자기계발(self-help)은 무엇인가? 모든 것의 책임이 나에게 있고, 모든 것의 해결을 내가 해낼 수 있다고 하는 강력한 자립의 이데올로기이다. 문자 그대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수 있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는 것이 아닌가. 두 말할 것도 없이 그런 하늘을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베르너 헤어초크의 1974년 작품의 제목이 더 옳다고 믿는다.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 Jeder für sich und Gott gegen alle> 실존인물인 카스퍼 하우저(Kaspar Hauser)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이 보여주는 바는 하늘이 그렇게 자비롭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실은 하늘의 냉정함이 아니라 사람의 잔인함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사실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사회는 사회로서의 제 구실을 하는 사회라고 보기가 어렵다. 젊은 열정 노동자들이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혹자는 아사하지 않던가. 아무도 남을 돌볼 수가 없을 만큼 버거운 현실이 바로 자기계발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괴물이 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계발과 자기책임

여하간 자기계발은 자기책임을 강조한다. 실패와 성공이 모두 내 소관에 달린 것이다. 일본의 자기계발이 특히 자기책임론에 기댄다. 그 연원을 알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그러한 정신구조의 형성에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 Self-Help>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71년에 소개된 이래, 일본 근대화의 초석으로 자리한 경전이 아니던가.

한국의 자기계발은 명백하게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도 또한 <자조론>을 개화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소개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일찍 근대화를 관철하며, 그들의 자기책임론은 심화되었다고 봐야할 것 같다. 무엇보다 일본은 매우 앞서서 자기계발을 수입하고 자기식으로 전유하였다. 우리의 본격적 수용은 IMF 즈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제 자기계발은 한국을 공히 지배한다. 지난 십여 년 간 우리의 내면에도 자기책임의 정서가 강하게 배어있었다. 그러한 노력을 극단적으로 강조할뿐더러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노력의 결과로 인한 차별을 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오찬호의 첫 책의 제목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문제작의 부제가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다. 이들의 정의는 차별의 존중이다. 지극히 비뚤어진 발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이것이 합리적인 상황이다. 이들에게 취업은 영혼이라도 팔아서 성취해야 하는 가혹한 지상명령이다. 이렇게 처절하게 쟁취해야 하는 정규직을 누군가가 데모와 파업 등을 통해 누린다는 것을 지금의 이십대들은 용납할 수가 없다.

헬조선과 흙수저 갤러리

한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인식에 다시금 새로운 변화가 생기고 있다. 바로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 헬조선의 강조와 더불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디시 인사이드에는 흙수저 갤러리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누가 더 못 사는 지를 두고 흙수저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곳은 흙수저들의 다양한 생존법들이 소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모으는 것은 주거 방식에 대한 것이다. 추위를 버티기 위해서 전기밥솥의 보온 단추를 누른 다음 밥솥을 껴안고 자라거나 혹은 두 장으로 겹쳐놓은 이불 속에서 입김으로 내부 공기를 덥힌 다음에 팔등과 정강이로 바닥을 대고 자라는 식으로 말이다.

주거 못지않게 음식에 대한 충고도 쏟아지고 있다. 일단 저렴하게 식재료를 얻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가령 돼지 껍데기도 아니고 돼지비계를 공짜나 1kg당 500원으로 사서 고기 맛을 느끼라고도 조언하는 식이다. 혹은 돼지 뒷다리를 흙수저도 고기를 섭취하게 해줄 수 있는 신이 내린 부위라면서 만원 어치를 사면 최소 석 달을 먹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흙수저와 인식 변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이른바 수저 이야기는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에 위배된다. 수저는 물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흙수저의 가난에는 자기 책임이 없다. 심지어 스스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 흙수저의 처지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인식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를 위한 강력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바뀌려면, 먼저 우리 내면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마혁명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서조합이었다. 선행 학습 덕분에 사회 개혁이 가능한 것이다. 지난번 칼럼에서 청년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요청했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절실한 것이 바로 공부이다.

찰나의 정념으로 거리에 뛰어드는 것보다 냉철한 정신을 따라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이 낫다. 지금은 우리의 인식을 바꾸고, 우리의 안목을 바로 잡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혹은 달리 말하자면, 지금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펙이 아니라 공부다. 차라리 취업을 뒤로 미루더라도 먼저 우리 사회를 바로 보게 해주는 책들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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