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전하의 국사(國事)는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하여 하늘의 마음과 인심(人心)도 이미 떠났습니다. 이는 마치 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중에 충직하고 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신하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에 달하여 그들의 힘이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래에서 희희낙락하며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으며, 내부의 신하들은 자기네를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부의 신하들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들여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국운이 흥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강남’으로 대변되는 일부 부유층이거나 민주사회에 살면서도 ‘그분이 시키는 대로 찍겠다.’는 말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는 자들 이거나,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살면서 제 살이 떨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주말에 삼삼오오 모여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면서 ‘이렇게 세상이 좋은데 무슨 고민을 하겠느냐.’며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자, 나는 중립이야’고 하면서 투표 날이 되면 득달같이 투표장으로 달려가 빨간색 정당을 찍는 장삼이사들일 것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은 직권을 이용하여 재벌과 결탁해 축재를 하고, 아랫사람을 종처럼 부리며, 힘없는 여성을 성욕의 도구로 삼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고개를 들고 다닌다. 낮은 지위에 있는 공무원 중에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윗사람한테 아부하고, 아랫사람한테는 윽박을 지르며, 권력의 개가 되어 국민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짖어댄다. 이런 부류들한테만 대한민국은 ‘천국’이며, ‘살만한 나라’일 것이다.

“대비(大妃, 문정왕후를 가리킴)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지변과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내렸으니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는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비록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과 같은 재주를 겸비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지푸라기 같은 한 명의 미약한 신하의 재질을 가지고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루마니아에선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나서 서른두 명이 사망하자 국민들이 일어나 정권을 바꿔버렸는데, 이 나라에선 삼백 명이 넘는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수장을 당했는데도 절반 이상의 국민이 ‘그게 왜 나라 탓인가’ 고 하거나 ‘그 탓을 왜 우리 대통령한테 돌리느냐’며 거품을 물고, 그러는 사이 구중궁궐에서 공주 대접만 받고 자란 사람에 불과한 대통령은 유유히 해외여행을 다닌다. 사실을 사실대로 전해야 할 의무가 있는 신문과 방송에서는 오로지 여왕을 떠 받들어 주기에 여념이 없고, 국민들의 고된 삶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멀쩡한 강물을 끊고 막아서 물고기가 죽고 강물이 혼탁해 졌는데도 ‘수질이 좋아졌다’고 하며, 온 나라에 가뭄이 닥쳤는데도 올해는 풍년이라고 떠들어 댄다.

따옴표 안에 있는 글은 조선의 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명종(明宗)에게 올린 상소문의 일부다. 저 글을 읽고 있으니 지금이 그 때인지 그 때가 지금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게 다 올바른 역사를 모르다 보니 내 혼이 비정상으로 되어 이런 상태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조식의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따왔습니다. 내용의 일부를 수정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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