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1911년 취리히에서 태어난 막스 프리쉬 Max Frisch는 20세기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알려져 있다.그가 살던 시기의 유럽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독재정치로 몸살을 앓는 격랑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스위스는 전쟁을 관망하며 ‘중립’을 고수하였으나 외부 정세에 대해 마냥 초연할 수만은 없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겉보기에 평온해보이지만 내면에는 불안을 품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한없이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속으로는 이방인에 적대적인 이중의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스위스인의 민족성이었다.

프리쉬의 희곡세계는 선량하고 교양적인 시민세계의 위선을 폭로하는데 집중됐다. 1958년 초연에 오른 『비더만과 방화범들』 또한 그 대표적인 예이다. 행상인을 자처하며 집에 침입해 방화를 저지르는 일당들 때문에 온 도시는 시끄럽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소시민인 비더만은 방화 사건이 실린 신문을 읽고 분개하며 그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던 중 방화 용의자인 행상인이 거실로 쳐들어와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맞아들인다. 전직 레슬링 선수인 슈미츠는 비더만의 ‘인간성’에 호소하며 그의 집 다락방을 차지한 뒤 방화를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

슈미츠가 찾아온 날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온다. 비더만의 사업 아이템인 탈모치료제를 개발했으나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해고당한 크네히트링이 그 한 명이다. 비더만은 방화범을 향해서는 두려움에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크네히트링은 잔인하게 문전박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크네히트링은 신변을 비관해 자살한다. 피고용인을 박대하는 비더만의 집에 방화범이 찾아온 것에는 숙명적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비더만이 방화범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태도는 위선적인 반면 크네히트링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태도는 진실해 보인다.

비더만과 그의 부인은 슈미츠를 잘 달래서 내보내려 하지만 슈미츠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감성’에 호소하자 그를 내치지 못한다.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슈미츠의 동료 아이젠링이 찾아온다. 불청객들이 다락방에 휘발유 통까지 들여놓자 화가 난 비더만은 다시 그들을 쫓아내려 하고, 때마침 크네히트링 자살 사건을 수사하러 경찰이 들이닥친다. 그러나 비더만은 그들을 고발하기는커녕 자신의 과오를 들통날까봐 거짓말을 하면서 그들과 공범이 된다.

방화범이 틀림없는데도 그들을 내쫓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더만은 자신의 공포를 과장된 낙관으로 위장한다. 그들이 방화를 준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비더만은 모든 사람이 다 방화범은 아니지 않느냐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억지 논리를 펼친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면 방화를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으로 두 방화범을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식사자리에서 여전히 방화를 계획하는 두 사람의 무시무시한 대화를 비더만은 ‘농담’으로 치부하며 웃어넘기려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된다. 아이젠링의 대사를 빌면 농담은 세 번째로 좋은 위장이고, 두 번째는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며, 가장 좋고 확실한 위장은 ‘적나라한 진실’이다.

때마침 배달된 조화(弔花)는 저 가장 확실한 위장을 보여준다. 자살한 크네히트링에게 보내기 위해 비더만 부부가 주문한 조화는 크네히트링 대신 비더만으로 이름이 거꾸로 적힌 채 그들에게 잘못 배달된다. 그러나 이 잘못 배달된 조화야말로 비더만이 곧 방화로 인해 죽게 되리라는 적나라한 진실을 암시하고 있다. 비더만은 코앞의 재앙을 외면하기 위한 거짓 논리에 완전히 무감각해져 방화범의 손에 성냥을 쥐어주기에 이른다. 이 성냥이 불씨가 되어 비더만의 집은 불타게 된다.

프리쉬는 비더만을 통해 당시 히틀러에 동조한 유럽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불온함과 만행을 뻔히 알고도 눈감았기에 역사적 참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폭력에 대항하지 않고 가담한 자는 폭력 자체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결국 자승자박으로 귀결됨을 비더만이라는 인물에게서 읽어낼 수 있다.

히틀러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이 작품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촌각을 다투며 터져 나오는 부정한 사건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기는 쉽지만 막상 눈앞에 그것이 닥쳤을 때도 용기를 낼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인터넷 뉴스에 비판적인 댓글을 달고 거기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만큼 우리는 실제로도 정의로운가? 그 모순과 괴리가 일상화된 오늘의 모습을 비더만이 마치 예견이라도 한 양, 세상은 좀 더 나아지기는커녕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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