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정부가 국정화하겠다고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와 관련된 논쟁은 식지 않은 것 같다. 그만큼 이 문제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이니,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것 자체야 나쁠 것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논쟁을 벌이고 있는 지는 의심스럽다. 논의 자체는 활발한 것 같더라도, 더 나은 논리와 근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자기 논리를 강요하는 행태라면 의미를 갖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측에서 주요 멤버로 등장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권희영 교수가 보이는 행태는 그 전형이 아닌가 한다.

원칙적으로 교과서 문제는, 어떤 방법이 학생들에게 더 나은 교육효과를 볼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정상이다. 그렇지만 현재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논쟁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하지 않는 국정교과서를 우리 사회에서 굳이 채택해야겠다는 이유부터가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것이 이유라니, 애초부터 이념싸움으로 끌고 들어간 셈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이념 편향이 심하다면, 교육적 측면에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펴왔던 근거를 보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지난 번 필자의 칼럼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지적해왔듯이, 그 근거라는 것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서술했음에도 이승복 사건, 천안함 사건을 빼놓았다는 점 등이 권 교수가 내세우는 근거다. 이렇게 북한의 만행을 적은 가짓수가 교학사 교과서에 비해 부족하다고 좌편향을 모는 행태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당당하게 할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권 교수 등의 주장보다, 방송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당사자를 두고 강력하게 응징하지 못하는 상대 패널들에게 더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럴 만큼 근거 같지 않은 근거로 좌편향을 조작해놓고, 이 조작을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용하는 행각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렇듯 우악스럽게 좌편향을 조작해내는 행각은 사실상의 폭력이다. 물론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그동안 지겨울 정도로 되풀이되어 온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는 이런 폭력이 이렇게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배경을 짚어보아야 할 것 같다. 사실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지 않다.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흔히 일어났던 일이니까. 아베 정권 치하에서 한참동안 이른바 ‘혐한류’라는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시위대가 재일교포 등에게 방송 카메라가 찍고 있는 상황에서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도 흔했다. 이 현상을 분석했던 한 연구자에게 확인한 바로는, 이렇게 폭력을 행사해놓고도 처벌 받은 자가 없다고 한다.

방송에 얼굴 드러내며 폭력을 행사해놓고도 처벌받지 않는 현상이,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버젓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뻔하다. 방송 카메라가 찍고 있는 상황에서, 믿는 구석도 없이 남들을 두들겨 팰 사람은 없다. 쉽게 말해서 권력의 비호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권력이 이렇게 파렴치한 폭력을 비호하는 이유도 뻔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원하는 일에 앞잡이로 동원했다는 것 이외의 해석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보다 더 가증스러운 앞잡이도 있다. 전문적인 지식을 팔아, 권력이 원하는 핑계를 만들어주는 자다. 일본은 그런 사례도 찾기 쉬운 나라다. 일본 역사에서 그런 짓을 한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자가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라는 유학자다.

유명한 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해 나아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손을 걸림돌로 여기고 제거하려 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거하기 위한 트집거리로 찾아낸 것이 있다. 그게 바로 호코사(方廣寺)라는 절의 종에 새겨 넣은 문구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절이 완공되면, 절의 종에 새겨 넣는 글을 새겨놓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호코사의 종에도 당연히 그런 글이 새겨졌고 그 내용은 ‘國家安康 君臣豊樂 子孫殷昌, 즉 국가는 평안하고 군신은 즐거우며 자손은 번창하리’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었다. 그런데 하야시 라잔을 중심으로 한 일부 유학자들과 승려들이 이 문구를 두고 해괴한 해석을 내놓았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의 이름(家康)을 잘라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저주를 걸은 것이고, ‘군신풍락’은 臣과 豊을 이어놓아 도요토미[豊臣] 가문의 번영을 기원한 뜻이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런 생트집을 잡아 대규모 토벌을 감행했고,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후 결국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서 더 추악한 점 하나를 더 짚어보자. 이런 치사한 트집을 잡아 권력을 장악한 측의 뒤처리 과정이다. 이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에 대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대망(大望)’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는 일본의 통일을 이룬 위대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과정도 일본 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위한 일로 치부된다. 하야시 라잔도 일본 성리학 발전을 이끌었던 유학자라고만 소개되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 유명 포털에서도 그런 식으로 소개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평가에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사실 완벽한 사람이 없는데도, 모두를 다 나쁜 놈으로 몰아가는 것 역시 문제가 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이런 측면을 감안한다 해도 어두운 면을 어둡다고 하지 않은 부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적당한 명분을 내세우면, 생트집 잡아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도 그만이라는 풍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명분을 내세워 이룩했다는 업적도, 정말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해서 평화로운 시대가 온 것 같지만, 일본 농민들은 수확의 반을 연공이라는 명목으로 바치며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도쿠가와 바쿠후에서는 백성들의 부담을 줄어주기 보다, 검소하게 살라고 미천한 백성들을 ‘계몽(?)’하는데 열을 올렸다. 통일의 위업 운운하지만, 결국 권력 다지고 누리려는 목적이었지, 피곤한 백성의 삶을 돌봐주려는 목적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기 위해 치사한 트집을 잡아 경쟁자를 제거한 행각을 두고 미화해주어야 할까. 현대의 일부 작가와 역사가들은 이런 일에 나선 것이다. 권력자와 지식인의 야합 행태는 시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더러운 역사를 미화하는 수법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위정자나 지식인들이 어떤 명분이나 이념을 내세우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주체사상이나 인민민주주의를 혐오하는 것도, 그런 명분 내세워놓고 수백만의 ‘인민’을 굶겨 죽이는 사태를 초래하는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내세우며 독재한 자들을 세기도 힘들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군사독재 시절에도 자유민주주의 추구한다는 말을 지겹게 들었다.

그러니 권 교수 같은 이가, 자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니 북한 같은 곳에서나 채택하고 있는 국정교과서를 추진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행각도 어떻게 보아야 할지 해답이 나올 것 같다. 어찌 보면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듣기 좋은 명분 내세워 놓고 자기들 사리사욕 채우는 정책을 강요하는 점이 더 비극일 수 있다. 그래서 이념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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