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하나의 이데올로기가 한 사회를 오래도록 지배할 때, 그 사회는 외견상 탈(脫)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어떤 사회보다도 이데올로기와 깊이 연루돼 있다. 이데올로기는 마치 자연 법칙처럼 사회 전반에 각인돼 있다. 따라서 사회의 표면적인 현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실을 드러내려면, 재현은 결코 사실적이지 않아야 한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독주하며 세계의 지배 논리로 굳어가던 1950년대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ürrenmatt가 연극에서 취한 태도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막스 프리쉬와 함께 20세기 스위스를 대표하는 극작가인 그에 따르면, 현실은 복싱이고 연극은 프로레슬링이다. 복싱이 상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순수하게 대결한다면, 프로레슬링은 하나의 볼거리로서 경기의 각본이 짜여 있을 뿐 아니라 과장된 연기를 통해 경기의 긴장감과 잔혹함을 배가시킨다. 경기의 본질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만 있다면, 과장은 과장이 아닌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노부인의 방문」은 위의 극작술을 십분 반영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탁월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도시 귈렌에 살던 소녀 ‘자하나시안’은 동네 청년 ‘일’과 사랑에 빠져 그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이를 부정당하고 비참하게 쫓겨난다. 그녀는 이후 부유한 남자들과 거듭 결혼해 재산을 상속받은 끝에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부호로 거듭난다. 세월이 흘러 파산 직전의 귈렌을 방문한 노부인 자하나시안은 자신을 환영하는 시민들을 향해 ‘정의’를 돈을 주고 사겠노라 선포한다. 즉 과거에 자신을 배신했던 일을 죽이면 귈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그녀의 제안을 겉으로는 거절하지만, 다음날부터 너 나 할 것 없이 값비싼 물건들을 외상으로 소비하면서 소득보다 지출이 앞서는 생활을 향유하기 시작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요소인 ‘정의’를 거금을 들여 사는 행위 자체는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 우선 일을 죽이는 것을 곧 정의로 설정하는 주체가 오직 자하나시안 뿐이다. 비록 과거에 과오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일의 목소리는 철저히 묵살 당한다. 시민들은 자하나시안의 제안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저 일방적인 정의를 수호하려 한다. 정의에 대한 값을 지불한 이가 바라는 정의만이 이루어지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의를 돈 주고 산다는 설정은 일견 지나치고 황당해 보이지만, 정작 실제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소비하는 주체이며, 이 사회에서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는 행위야말로 정의로운 행위로 여겨진다. 또한 이 사회의 정의라 함은 값이 책정될 때 그 이면에서 부당하게 작용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값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행위만을 처벌하는 것에 가깝다.

또한 자하나시안은 스스로 일을 죽이거나 목적 없이 돈을 기부하지 않고 정의의 대가로 귈렌에 ‘투자’를 약속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현실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자를 ‘직접’ 도와주는 것은 결코 생산적이지 않다. 예컨대 부자들이 빈자를 위해 사회에 거액을 ‘기부’할 때, 그들은 존경과 명예를 이윤으로 취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자하나시안이 귈렌에 투자하는 대가로 정의를 요구할 때, 정의는 투자에 대한 한낱 이윤으로 전락한다. 요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로스쿨만 해도, 법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에 높은 값을 책정해 이를 지불한 이에게만 정의라는 이윤이 떨어지도록 하는 고약한 시스템이지 않은가. 작품 속 과장된 논리들보다 오늘날 현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시민들이 빚을 내면 낼수록 도시의 질적 수준은 높아만 간다. 빚으로 융통한 더 나은 음식과 더 좋은 옷, 더 좋은 건물들로 점점 화려해져 가는 무대는 연극 초반 다 쓰러져가던 귈렌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그 화려함에 섬뜩함을 더한다. 현실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하는 이 섬뜩함 또한 현실과 그렇게 잘 부합할 수가 없다. 도시의 많은 건물들은 투자라는 형태의 빚으로 쌓아 올린 것인 한편, 우리는 먹고 입는 것들을 대출한 돈으로 융통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너무나 익숙해져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뒤렌마트는 프로레슬링처럼 과장하고 치장한 뒤 달리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한다.

도시의 빚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쌓여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은 결국 일을 죽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일 또한 처음에는 저항해보지만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없음을 깨닫고 이내 체념한다. 거대한 인간 터널에 둘러싸여 일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경제를 명분으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참극. 이 또한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우리 사회의 결코 지울 수 없는 민낯이다.

뒤렌마트가 의도했듯이 아주 조금만 시야를 달리 하면 지금의 현실이야말로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실체가 너무나 쓰려 대부분은 그 실체를 부러 보려는 노력을 꺼리는 편이다.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송곳>의 부진한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현실의 실체를 외면하게 하는 드라마가 오랫동안 선호돼 왔다. 현실이 너무 기가 막혀서 뉴스를 틀었는데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시대. 이 시대를 우리는 언제쯤이면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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