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마음이 복잡하게 충돌하면 표정도 뒤섞인다. 근래 세월호 청문회에서 답변하는 정부 측 증인들의 얼굴이 그렇다. 애처로운 처지가 보이는 사람도, 잘못 없다 항변하려는 사람도 비슷한 표정을 자주 보여준다. 그런 표정의 뿌리는 보통 어렸을 때 생긴다.

거짓말을 했다가 엄마의 유도심문에 걸려 진실을 말해버린 5살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벌어진 자기 입을 손으로 막는다. ‘놀람’이라는 표정과 ‘감춤’이라는 행동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15살 정도만 되면 자백이나 다름없는 큰 손동작은 삼가게 된다. 그 대신 입을 막고 싶은 욕구가 변형돼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하는 등으로 변한다.

성인은 손짓을 더욱 간소화 시킨다. 입은 건드리지 않는다. 콧망울을 두세 번 긁거나, 있지도 않은 눈곱을 뗀다. 또는 귓바퀴를 의미 없이 두어 번 당기거나 목을 긁는다. 속임수가 들통 날 것 같은 불안으로 입을 막고 싶지만 간신히 억누르기에 나오는 어색한 동작이다.

속이는 게 목적이라면, 여기서 나아가 특정한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들을 이용해 자신의 상태를 주장할 수 있다. 감정을 나타내는 몇가지 표정들로부터 표현의 코드를 빌려오는 방식이다. 상대가 받아주었으면 하는 -속아주었으면 하는– 주장을 표정이라는 신호로 전달해 자신이 의도하는 바에 끌려오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를 간편하게 ‘전도(傳導: 전하여 이끔)’라고 부를 만 한데, 그렇게 베낀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해 자신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속셈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위해 표정을 사용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상사가 지나갈 때 열심히 일하는 척 하는 직원은 미간에 힘을 준다. 슬프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어 상주에게 공감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괴로운 고민에 빠졌다는 걸 알려주고 싶을 때는 두 눈을 꼭 감는다.

가령 세월호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123정장이 바로 그런 표정을 지었다. 세월호 침몰 당시 하지도 않았던 퇴선 명령을 했던 양 거짓 기자회견 하라 지시한 윗선이 누구냐는 질문에, 123 정장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며 두 눈을 꼭 감았다. 줄곧 숙여진 고개는 이 때 더 숙여진다. 일견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우 굳게 다물어진 입은 반대의 추측을 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 입매는 입 밖으로 말을 내보내지 않으려는 심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나지 않는 이름이나 상황을 말하고자 할 때, 말하고 싶어 하는 단어와 가장 근접한 첫번째 어절의 입 모양을 내려고 애를 쓴다. 입가에 맴도는 그 발음을 위해 입술을 들썩인다. 그러면서 보통은 입이 반쯤 벌어진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되새겨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는 반대로 매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았지만 대신 입술을 앙다물어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보여준 것은 짐짓 심각한 고민중이라는 듯 두 눈 꼭 감은 표정과, 입 밖으로 나와선 안될 말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이 혼재된 상태다. 답변하기를 재촉 받고 떠올리려 애 쓰는 눈매를 했지만, 입매는 나오는 말을 막으려는 듯 굳세다. 공무 조직의 한낱 끄트머리인 123정장의 눈썹과 입술이 충돌하고 있었다. ‘놀람’이라는 상태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감춤’이라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진실로 떠올리려 노력 중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전도’하려는 어떤 전형 같았다. 그리고 세월호 청문회에 나온 많은 정부 측 인사들의 입이 그렇게 꽉 다물어져 있었다. 다만 지위가 높아질수록 좀 더 매끄럽게 감출 뿐이다.

그러나, 왠지 모를 위선의 표정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불편함을 느낄 줄 안다. 특별한 지식이 없거나 교육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상대방의 몸짓 언어를 손쉽게 파악 하곤 한다. 심지어 표정 뿐 아니라 목소리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그 걸 직관이나 본능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꺼림칙한 그 느낌이 사기꾼을 막아주고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제해 준다.

세월호 국면에서 많은 이들이 그런 불편함으로 점철 되어있는 수많은 표정들을 포착했다. 그 대부분은 정부측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견 되었다. 세월호 뿐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많은 일들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그러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장면에서, 국정교과서 논란의 복판에서, 도심 집회를 대하는 모습에서, 그 밖의 수많은 장면에서 정부관계자들이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것이고, 이 정부를 믿으라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본능이 늘 맞을 수 없을뿐더러, 그릇된 본능이 일으킬 오해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이 받은 그 느낌은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사자인 정부가 이 신뢰의 문제를 풀어야 하지만, 동시에 발화자인 그들을 신뢰 할 수 없어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 힘들다.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일까. 지금의 정부는 항상 눈과 입이 충돌하는 청문회 증인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이 유통 가능한 것은 시민사회가 용인하기 때문이다. 시민의 묵인에 의해 시대는 정의된다. 사회가 묵인하는 표정이 권력의 표정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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