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니체는 19세기 말 과도기적 세계의 피안에 홀로 서서 근대 사회가 쌓아온 가치와 진리를 부정했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 그로 인한 경제의 발전은 겉보기에는 인류의 진보를 보란 듯이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예민한 심성을 소유한 니체의 눈에는 그 찬란한 성과들의 저변에서 서서히 곪아 오르는 몰락의 징후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언명대로 ‘신은 죽은’ 시대의 인간들을 향해 니체는 쓴 소리를 내뱉는다. “슬프구나! 인간이 더 이상 아무런 별도 낳지 않게 될 때가 오고 있다. 슬프구나!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도 모르는 가장 경멸스런 인간의 시기가 오고 있다.”

저 ‘별’에 버금가는 수많은 가치들이 퇴락하고 세속화된 현대의 인간들은 니체가 일찍이 예고한 대로 가히 경멸의 군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추구하지도, 창조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인간들로 넘쳐나는 시대가 니체의 말대로 오고야 말았다. 전 세계를 누빌 수 있고 전 세계의 만물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글로벌 시대’라고 하지만, 스마트폰이라는 플랫폼으로 광활한 인터넷을 누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우리의 실상은 직장에 놓인 한 뼘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가정이라는 최후의 보금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지?

사회의 진보와 인간 개인의 진보가 어느 정도 구보를 맞추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일이 되었다. 오늘날 사회의 진보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약속해주는 듯한 선전과 수사에 동원될 뿐, 개인이 피부로 직접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 됐다.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 사회 혹은 지배층에 예속된 상태가 너무 오래도록 지속돼 이제는 본능에 가까운 수준으로 인간 내부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내 일신의 안락을 영원히 허락해줄 수 있는 영토를 지키려는 노력은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별’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유일한 영토가 지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예컨대 가정은 보금자리인 한편 언제든지 지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커뮤니티가 언제나 나에게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영토 안에는 언제나 국경이 숨어 있다. 나의 영토 안에서도 나는 언제든지 국경 밖으로 배제되고 추방될 수 있다. 왕국은 곧 적지(敵地)요, 적지는 곧 왕국이다. 이는 알베르 카뮈가 1957년에 출간한 소설집 『적지와 왕국』을 관통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그 중 한 화가의 삶을 담담하면서도 쓸쓸한 문체로 옮기고 있는 「요나」에서는 예술세계와 생활세계를 무 썰 듯 분리할 수 없는 한 화가의 고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아내와 아이 셋과 함께 살고 있던 화가 요나의 집은 비평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늘어나는 주변인들로 인해 몸살을 앓는다. 지인들은 수시로 찾아와 저녁 늦게까지 수다와 토론을 늘어놓기 일쑤다. 늘어난 제자들은 그의 대단치 않은 작품에서도 뜻밖의 엄청난 의미들을 캐내어 그를 으쓱하게 하는 한편, 그가 작업 중에 초콜릿을 깨물어 먹는 사소한 버릇까지도 제자들 앞이라 쑥스러워 철회하게 한다. 유명세가 따르는 만큼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리고, 온갖 편지들이 집으로 날아든다. 집안의 궂은일은 아내가 모조리 떠맡고 있음에도 요나는 자신에게 밀려드는 관심과 작업을 소화하기에 역부족이다. 가족들과 단란하게 지내고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던 집이 방문객들에게 점령당할수록 그는 점점 창작욕을 잃어가고, 덩달아 그의 명성도 조금씩 기울어간다.

한때 자신의 편이었던 이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 그는 예술가들이 자주 다니는 장소를 피해 아는 사람이 없는 변두리 지역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실없는 이야기나 나눌 수 있는 웨이터를 친구 삼아 소일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들어주고 끄덕여 주는 여자들과 술에 찌들어 동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부진한 작업은 나아지지 않는다. 주가가 한참 떨어져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집으로 다시 돌아온 요나는 천장이 높은 집 허공에 판자와 사다리를 동원해 자신만의 다락을 만들고 그곳에 틀어박혀 작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집안 식구들과 헤어지지 않고도 혼자 있을 수 있는 행운”은 그의 창작열을 다시 부추긴다.

흔히 우리가 ‘일과 사랑’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고 표현하곤 하는 해묵은 논리가 이 작품 속에 들어 있다. 비록 아내가 살림을 모조리 뒷바라지 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만, 처음에 요나는 집에 틀어박혀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집은 그의 왕국이었다. 점차 명성을 얻으면서 드나드는 사람들로 집은 서서히 그의 적지가 되어간다. 밀려드는 변화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적지를 떠나 방랑길에 오르지만 그 어딘가에 왕국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적지가 된 집에 작은 왕국을 세운다. 이제 집은 적지가 될 수도, 왕국이 될 수도 있게 됐다. 그럼에도 가장 본질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기란 답보 상태에 놓인 채로 글은 끝을 맺는다. 다락에 칩거할수록 그는 가족들과 소원해지며, 그렇다고 대단한 작품을 완성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결말이 비극적이지는 않다. 예술이라는 별을 약속해주는 듯 보이던 곳이 순식간에 불모지로 전락했음에도, 바로 그 불모지가 아니고서는 별을 쫓을 수 없다는 진리를 요나는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간을 그려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과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운 일을 인간은 감수하며 살 수밖에 없음을, 카뮈는 『적지와 왕국』의 단편들을 통해 역설한다.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별을 잃은 세계에 예속된 ‘경멸스러운’ 인간들임이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카뮈가 역설한 삶의 모순을 기꺼이 끌어안으려 노력하는 만큼은 스스로가 별이 되어볼 수 있는 인간들임에도 틀림이 없다. 그 모순이란 적지인 동시에 왕국인 세계를 견디는 것, 즉 적지에서도 왕국을 발견하려 노력하고, 반대로 왕국에 적지를 품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카뮈의 글을 읽은 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환멸스러운 이 시대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큰 가능성을 품고 있으리라는 착각의 별을 한 번 품어 보았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카오스를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그대들은 아직 카오스를 간직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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