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융

공정한 공자의 후예

196년, 조조는 한나라의 황제를 옹립했다. 조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고, 실권이 없는 황제는 허수아비와 같았다. 조조는 승상이 되어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나랏일을 임의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조조의 월권에 분노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조조의 부하들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렇다 할 힘을 쓰지 못했다.

조조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정적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첫 번째 숙청대상은 태위벼슬을 하고 있는 양표라는 사람이었다. 조조는 부하를 시켜 자신한테 양표를 무고하도록 했다. 형식상으로나마 보고하는 절차를 거쳐야 숙청에 정당성이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승상(조조를 가리킴)께 아룁니다. 태위 양표는 역적인 원술과 친척입니다. 이 자가 원술과 내통한 혐의가 있으니 심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보고를 받은 즉시 부하에게 명령하여 양표를 문초하도록 했다. 양표는 심문 중에 죽거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될 처지에 놓였다. 이 때 북해태수 공융(孔融)이 조조의 근거지인 허창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공융은 유명한 공자(孔子)의 후손이며, 중국문학사에서 건안칠자(建安七子, 건안시기의 일곱 명의 유명한 선비)로 일컬어질 만큼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고, 자부심도 강했다.

공융은 곧바로 조조를 찾아갔다.

“양표의 집안은 4대째 조정의 벼슬아치를 배출한 명문가입니다. 양표는 덕망 높은 사람입니다. 원술하고 친척이라고는 하나 그 사람과 내통한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라의 재상을 함부로 벌 줘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냉랭하게 말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조정의 공론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조조 앞인데도 공융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발끈 화를 낸다.

“승상께선 지금 조정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서 처리하고 결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만약 옛 주나라의 어린 왕이었던 성왕이 삼촌인 소공을 죽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함께 성왕을 보좌하던 삼촌 주공이 이를 두고 ‘나는 모르는 일이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안 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공융은 양표와 조조를 각각 소공과 주공에, 성왕을 한나라의 어린 황제인 헌제에 비유한 것이다. 양표와 조조는 함께 헌제를 보좌하는 신하인데 그 중 하나를 죽게 내버려둬서야 되겠냐는 말이다. 이 안에는 옛 주나라의 주공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지 않고, 잘 보좌했는데, 조조 당신은 왜 함부로 월권을 하느냐는 질책도 들어 있다. 조조의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공융이 명분을 갖고 따지고 드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조조는 양표를 죽이지는 못하고 벼슬을 빼앗은 다음 시골로 보내 버렸다. 공융은 이렇게 한 사람을 살려냈다.

자신을 구하지 못하다

조조는 가장 강력한 상대였던 원소를 제압하고, 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유표와 유표에게 의지하고 있던 유비를 죽이려 했다. 208년 7월 조조는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공융은 조조의 진영에 몸담고 있었으나, 자신은 조조의 부하라기 보다는 한나라 황제의 신하라고 생각했다. 조조의 결정에 반기를 든다.

“유표와 유비는 황실의 종친입니다. 함부로 정벌해선 안 됩니다. 게다가 강동지역의 손권은 여섯 고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장강의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가볍게 취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승상께서 의(義) 없는 군대를 움직이시면 천하 사람들의 신망을 잃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벌컥 화를 낸다.

“저들은 모두 황제의 명을 거역하는 신하들인데, 어째서 우리 토벌군더러 의 없는 군대라고 하는가!”

조조는 공융을 내보낸 뒤에 대신들한테 선언했다.

“만약 다시 공융처럼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목을 베겠다.”

공융은 물러 나와서 하늘을 보며 긴 탄식을 한다.

“지극히 불인(不仁)한 사람이 지극히 착한 사람을 치려고 하는데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소 공융한테 무시를 당하던 극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극려의 집에 기숙을 하던 식객 한 명이 공융이 한 말을 그대로 극려한테 일러바쳤다. 극려는 곧바로 조조한테 찾아가서 고자질을 했고, 조조는 크게 화를 내면서 공융을 감옥에 가둬버렸다. 그 후 곧바로 공융을 죽이고, 시체를 조리돌렸다.

공융한테는 나이 어린 아들 형제가 있었다. 공융이 옥에 갇히자 하인은 이들더러 몸을 피하라고 했다.

“부서진 둥지 안에서 어찌 알이 성할 수 있겠는가.”

공융의 아들다운 말이라 해야 하는가. 조조는 사람을 보내 이 둘은 물론 공융의 가족 모두를 죽이게 했다. 공융은 바른 말을 해서 남을 구했으나 정작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신중했던 사람

공융은 공자의 후예로서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맞게 깊은 학식까지 갖춰 당대에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실권자인 조조한테도 굽히지 않았으니 그보다 낮은 사람들한테는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한테는 매몰차게 대했을 것이다. 극려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되 오만했다고 한다.

공융의 친구 중에 지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지습은 평소에 공융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는 성정이 너무 강직해서 탈이야. 그 성정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큰 화를 입을 거야. 조심하게.”

보통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은 일처리를 빨리하려 하고, 성급하게 마련인데 공융은 그렇지 않았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먼저 앞뒤를 따졌으며, 매사에 신중을 기하고자 했다.

199년, 조조한테 의지하고 있던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겠다고 핑계를 댄 후, 군사를 얻어 서주지역으로 향했다. 유비는 서주에 도착한 뒤 조조의 부하를 죽이고 서주 지역에서 독립을 해 버렸다. 조조는 우선 왕충과 유대를 보내 유비를 상대하게 했지만, 이들은 유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소득 없이 돌아오자 조조는 화가 나서 둘을 죽이려 했다. 공융이 나섰다.

“유대와 왕충은 원래 유비의 적수가 못 되었습니다. 승상께서 보내 놓고, 이제 와서 목을 베신다면 장수들한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깊이 살피시고 처리하십시오.”

조조는 공융의 말을 받아들여,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동하려 했다. 공융이 또 말린다.

“지금은 추운 겨울입니다. 이 시기에 군대를 움직이면 안 됩니다. 봄이 되어 출병을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남쪽의 장수와 유표를 항복시킨 후에 천천히 서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역시 조조는 공융의 말을 받아들였고, 이듬해 5월에 유비를 무찔렀다. 이처럼 공융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조조가 원소와 싸우겠다고 하자 공융이 말했다.

“원소의 영토는 넓고, 군대는 강합니다. 전풍·허유처럼 능력 있는 책략가가 원소를 도우며, 심배·봉기처럼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습니다. 안량·문추와 같은 용장이 원소의 군대를 통솔하고 있으니 아마 이기지 못할 겁니다.”

이때만 해도 조조의 세력이 원소에 비해 약했던 것이 사실이므로, 공융은 그에 따라 말을 했던 것이다. 알다시피 조조는 원소를 공격해서 이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융의 식견이 얕았다고 일축할 수는 없겠다.

공융은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한테 오만했던 점은 있으나, 강직한 성정을 바탕으로 소신껏 살아간 사람이었고, 신중했으며, 공정하게 일처리를 했던 사람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자신을 버려서 헌법을 지키다

국회에서 법이 만들어지면 정부에선 그 법에 따라 시행령을 만들게 되는데, 이전까지는 법과 시행령이 부합하지 않으면 국회에서 정부로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통보’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기존 국회법의 내용이다. 이럴 경우 국회에서 제대로 된 법을 만들어 냈다 하더라도, 정부에서 임의로 시행령을 만들어 법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래서 여야는 2015년 5월, 시행령이 원래 법의 취지와 어긋날 경우 이를 정부에 ‘통보’만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행령을 ‘수정’ 하거나 ‘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국회법을 일부 개정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입법권과 사법부의 심사권을 침해하고 결과적으로 헌법이 규정한 3권 분립의 원칙을 훼손해서 위헌 소지가 크다. (…)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다시 시도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가 없다. (…) 국회법 개정안으로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은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2015. 6. 25. 아이뉴스24>

국회에서 합의한 내용을 대통령이 거부하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시비여부는 우선 놔둔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밝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 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다. 정치는 국민들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들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2015. 6. 25. 아이뉴스24>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속해 있는 새누리당의 원내대표인 유승민을 향해 공개적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여야의 합의 사항을 ‘유승민의 정치철학 또는 논리’로 일축해 버린 것이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새누리당 김태호 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유승민은 원내대표 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대체 유승민이 뭐라고 말을 했기에 대통령과 자당의 최고 위원한테 공격을 받았던 것인가.

“엊그제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인양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고, 지난 1년의 갈등을 씻어주기를 기대하면서, 저는 정부에 촉구합니다. 기술적 검토를 조속히 마무리 짓고, 그 결과 인양이 가능하다면 세월호는 온전하게 인양해야 합니다. 세월호를 인양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지키고, 가족들의 恨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양극화를 말했습니다.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했던 그 분의 통찰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이제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새정치민주연합은 ‘경제정당, 안보정당’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의당은 ‘미래산업정책’을 말하고 있습니다. (…) 놀라운 변화입니다. 환영합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재벌정책은 재벌도 보통 시민들과 똑같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재벌그룹 총수 일가와 임원들의 횡령, 배임, 뇌물, 탈세, 불법정치자금, 외화도피 등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 보통 기업인들과 똑같이 처벌해야 합니다.”

“저는 소득주도 성장을 정치적으로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제대로 된 성장의 해법이 없었던 것은 지난 7년간 저희 새누리당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녹색성장과 4대강 사업, 그리고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습니다.”<이상 2015. 4. 9. KAN24.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 교섭단체 대표연설문’ 중에서>

이것이 대통령이 말한 ‘원내대표’ 유승민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라고 할 수 있겠다. 국회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바탕에는 이와 같은 유승민의 소신이 있었던 것이다. 유승민은 기존의 보수정당은 ‘수구적’이며 ‘친재벌적’이며 ‘성장만 중시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 통념을 깨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정당과 그 정당에서 배출한 대통령한테까지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할 것입니다.”<2015. 6. 25. 연합뉴스TV>

대통령의 이 한 마디에 유승민은 원내대표 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유승민은 탄식했다.

“내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다. (…)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내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 가치는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다. (…)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다”<2015. 7. 8. 아주경제>

바른 말을 하다가 비명에 횡사한 공융처럼 유승민 역시 소신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자리를 잃었다. 공융의 어린 아들까지 죽인 조조처럼 대통령은 유승민의 부친상이 났을 때 조화조차 보내지 않았다. 이른바 ‘친박’세력에게 버림받는 처지가 됐고, 유승민의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 지역구에는 친박의 지원을 받는 이재만이 둥지를 틀고 있다. 참 잃은 것이 많고, 어려운 처지가 됐다. 그러나 ‘헌법의 가치’, ‘법, 원칙, 정의’를 지켜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유승민은 합당하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보수의 중심에서 ‘왼쪽’을 가리키다

사실 유승민의 저러한 절충적 발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같은 당의 김무성이나 자극적 발언을 쏟아내어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의원들에 의해 가려져서 주목받지 못했던 것뿐이다. 유승민은 지난 2011년 7월 새누리당 당대표 경선에서 2위를 차지하고 최고위원이 된 뒤 이런 말을 했다.

“민생복지 분야에서 당이 노선과 정책을 왼쪽으로 가야한다. 홍준표 대표와 구체적 얘기는 안했지만 그분도 한나라당의 (정책) 중심이 이동해야 한다고 믿으리라 본다.”

“무상급식에 대해 홍 대표는 세금급식이라며 천천히 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최고위원들) 각각 생각들이 다르다. 이제까지는 당 대표가 되면 했으면 하는 주장이었는데 앞으론 홍 대표와 언론 및 국민 앞에서 얘기할 때 합치된 의견을 내놓겠다.”

“당장 내년 총선을 겨냥한 (지역균형 관련) 약속을 준비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처럼 약속했다가 동남권 신공항, 과학벨트처럼 왔다갔다, 세종시처럼 비틀거려선 안 된다. (…) 방법은 잘못됐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역균형발전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보수우파 정당의 최고위원이 과감하게 ‘당이 왼쪽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며 무상급식에 찬성을 하며, 제한적이나마 상대진영에서 배출한 대통령의 장점을 인정해 주고 있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이던 시절에는 이런 말까지 했다.

“5·16이 쿠데타라는 것은 상식이고, 유신이 헌정질서를 파괴했다는 것에 많은 분이 동의한다. 대선 후보로서 과거사를 평가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게 맞다.”<2015. 7. 10. 한겨레신문>

얼핏 봐선 새누리당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유승민은 새누리당에 있음은 물론 보수의 심장부인 대구를 기반으로 삼아 활동하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지역에서 태어난 저는 스스로 TK 적자라고 생각한다. 한 번도 당을 떠나서 어디를 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 저는 새누리당이 변하면 대한민국이 변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 어디 바깥분들과 그럴 생각이 없다. (신당을 창당한) 천정배 의원님이 자꾸 제 얘기를 하는데 한 번도 안 만나봤다” <2015. 11. 24. 뉴스1>

“(안철수 신당에) 갈 생각이 전혀 없다. (…) 저는 보수가 몸에 밴 사람이다.”<2016. 1. 4. 연합뉴스>

유승민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면서 정치를 시작했고, 이후 18대, 19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을)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 뿐인가. 얼마 전 작고한 부친 유수호는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대구 중구에 출마하여 당선됐고, 14대 총선에서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에 출마하여 당선된 사람이었다. 보수진영 안에서 ‘왼쪽’을 말했지만, 왼쪽으로 갈 사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는 말이 있기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새누리당을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선후보가 되기는 어려운 사람

북해태수 공융과 유승민은 많은 점이 닮았다. 공융은 공자의 후예로 태어나 최상의 지식을 소유했으며, 명성이 있었고, 한 지역의 태수를 역임한 뒤 중앙으로 진출했다. 유승민 역시 집안의 지원 아래 1976년, 지역의 명문 경북고를 졸업했고, 198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1987년에는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승승장구했고, 원내대표까지 역임했다.

공융은 권력자인 조조에 맞서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죽었고, 유승민 역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다가 배신자의 낙인이 찍혀 원내대표 직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친박’세력은 유승민을 낙마시키기 위해 대구 동구(을)에 전 동구청장 이재만을 내세운 상태다. 지역민들의 여론도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고 있어 유승민은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공융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승민 역시 여기에서 꺾일 것인가.

“사실상 당내 공천이 당선인 이 지역에서 새누리당 지지자의 48.5%가 유 의원을 선택한 반면 이 전 청장 지지율은 37.7%에 불과했다.”<2016. 1. 5. 한국일보>

“내일신문이 시대정신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누가 더 적합하냐는 질문에 유승민을 택한 답은 55.9%로, 이재만(36.5%)보다 19.4%p 높았다.”<2016. 1. 13. 내일신문>

현재로 봐선 유승민이 당내 경선을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예측된다. 만약 경선에서 패배한다면 사실 상 정치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므로 완전히 ‘공융’과 똑같아진다. 이 지역은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는 것이 곧 총선에서의 당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귀추가 주목된다.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데…”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죠. 저는 국회의원을 무슨 직업으로 하는 국회의원도 아니고 저는 모든 정치인은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는 꿈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그런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이상 2015. 10. 26. JTBC>

유승민은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뒤 차기 여권의 대선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났지만, 유승민은 대선후보를 ‘꿈꾸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겠다. 실제로 유승민이 새누리당의 대선후보가 된다면 야권에서 이 사람을 쉽게 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은 꿈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유승민의 성향이 보수를 바탕으로 하되 ‘개혁적’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겠지만, ‘보수’의 속성 중 하나가 ‘변화를 원치 않고 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승민은 보수진영 모두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유승민의 원내대표직 상실은 이러한 보수의 속성이 오롯이 드러난 결과라고 본다. 총선에서 당선된다면 순간적으로 지지율이 오르겠지만, 대선 판도를 흔들만한 위력을 지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어느 정도의 지지율을 획득한다고 하더라도, 김무성이나 여권의 대선후보군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반기문 UN 사무총장의 벽을 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보수 안의 보수’들이 개혁적인 유승민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승민은 한 지역의 태수였던 공융 이상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 세력은 유승민을 대선후보로 내세울 정도로 깨끗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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