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아, 우리 이천만 동포는 국가가 이처럼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도 결심하는 이 없고 방도를 기획하는 일 한 가지 없으니 나라가 망해도 괜찮다는 말씀인지. 우리의 국채 1300만원은 대한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일지니, 우리가 어찌 월남 등 멸망한 민족의 꼴을 면할 수 있으리오! 이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300만원이 될 것이니, 국민들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서 잠시만 결심하면 갚을 수 있는 일이라!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홈페이지 中

위의 인용문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우국지사들이 발표했던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문의 일부이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릴 1월 29일은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던 날짜이기도 하다.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운동을 추진 중이기도 하다. 국채보상운동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간 차원에서 시행했던 비폭력적 독립운동이 하나이며,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기부 운동 중 하나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쉽게 얘기하면 나라의 빚을 국민들의 힘으로 갚자는 운동이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선포 등을 통해 자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열강, 특히 일본 제국주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다른 열강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주권을 점점 침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고문을 파견하는 고문정치, 통감부를 설치하는 통감정치, 그리고 그 유명한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기에 이른다.

일제의 침탈은 정치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경제에 관한 것도 예속시키려고 하였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경제를 자신들에게 복속시키려고 한 수단 중 하나가 차관의 강제 제공이었다. 일제는 화폐개혁, 금융공황 구제, 교육기관 확충, 도로와 항만의 개보수와 확장, 일본인 관리 고용 등 다양한 명목으로 차관을 강제로 제공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당시 돈 약 1300만원의 빚을 일제에 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율 또한 높아서 채무를 갚지 못하면 나라의 토지와 경제가 통째로 일본에게 넘어갈 위기에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나선 것은 국민들이었다. 특히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애국지사들이 국채보상을 논의했고, 1907년 1월 29일에 서상돈이 대동광문회에서 국채보상을 제안했고, 이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작이었다. 다음 달 서상돈, 김광제 등은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을 『제국신문』에 발표했다. 신문에 실린 이 취지문은 서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그 결과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 나이와 신분, 지역을 막론하고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펼쳐졌고, 그 결과 4월 말까지 보상금을 기탁한 사람은 4만명이었고, 5월까지 모인 금액이 230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렇게 펼쳐졌던 민간 차원의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엄청난 방해를 받게 된다. 일제는 국채보상기성회 총무였던 양기탁을 국채보상기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가 무죄로 석방했고, 함께 활동했던 베델을 국외로 추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쇠퇴했고, 일제는 또한 더 많은 차관을 우리 정부에 강요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기금은 장차 애국계몽운동의 자금으로 쓰이기로 결정됐고,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한강변에 양질의 토지 매입에 사용됐다. 이후 한일강제병합을 맞이했지만, 이 때 모금된 기탁금은 훗날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소중한 종잣돈이 됐다.

국채보상운동을 검토하면, 일제의 계속적인 경제침탈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직전까지 우리나라의 항만, 삼림, 광산 등의 이권을 마구 침탈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을 바탕으로 재건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기간 시설 확충에 차관을 제공하면서 이권을 앗아갔다. 이 과정에서 군사독재정권 시절 한일국교정상화가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허구도 파악할 수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제 덕분에 우리 경제가 근대화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우리나라 경제의 근대화를 위해서가 아닌 조선의 강제 병합을 위해서 마수를 뻗쳤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일제의 경제 침탈에 ‘모금’이라는 형태로 저항하였다. 즉 우리 국민들이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 지역과 신분, 성별을 막론하고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국채보상운동과 IMF 때의 금모으기가 그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대한 올바른 교육은커녕 왜곡이 이어지고 국민들이 살기 더 팍팍해진다면, 정작 국민들의 힘이 필요할 때 어떤 국민이 그 힘을 보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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