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지난해 12월 고려대 장하성 교수의 단행본이 출간됐다. 이 신작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돌베개)를 연상시키는 <왜 분노해야 하는가>(헤이북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부제가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이다. 한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게다. 명백하게 정치적인 텍스트다.

분노하라는 지엄한 명령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은 명확하게 이러한 정치적 분노의 당위성을 전제하고 있다. 심지어 서장의 제목은 “정당한 분노를 해야 할 때다”이다. 비록 “정당한”이라는 형용사로 한정짓기는 했지만, 바로 지금 분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해야 한다는 것은 지엄한 명령이다. 장하성은 책에서 그 당위성의 근거를 해명하고자 한다.

사회 변혁을 위한 정치적 불쏘시개로 활용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집필한 것이다. 변혁에는 행위자가 필요하다. 불평등한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누군가를 정치적 호명의 대상을 상정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하성은 신작에서 명확하게 대상을 상정하고 있다. 과연 누구일까? 한국의 모든 시민일까? 아니면 가난한 하층민일까? 아니다.

장하성의 속내는 목차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468쪽에 달하는 이 두툼한 저작의 마지막 3부 제목은 “정의로운 분배의 미래 - 누가 세상을 바꿀 것인가?”이고, 마지막 9장 제목이 “청년이 세상을 바꿀 때다”이다. 마지막 장의 마지막 절 제목은 “청년세대가 희망이다”이다. 그렇다. 저자 장하성 교수는 청년 세대를 호명하고 있다.

청년을 향한 초대장

나는 여기에서 익숙한 초대장을 발견한다. 자기 세대의 한계를 자각한 어른 세대가 아직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은 청년 세대를 호출하고, 위임한다. 사회 변혁의 임무를 맡기는 것이다. 바로 청년 세대가 힘을 합쳐 이 뒤틀린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청년이 희망이고, 내일이다. 좋은 메시지 같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장하성 교수의 태도는 청년을 대상화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어른이 청년을 타자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장하성 교수가 우리 사회와 청년 세대에 대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모두 긍정할 수는 없다. 중세 유럽의 크리스찬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것도 좋은 의도에 따른 것이다.

일단 장하성 교수의 생각을 정리해보자.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어른 탓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바꿀 능력과 의지가 없다(혹은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를 바꾸려면, 너희=청년들이 나서야 한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뻔뻔한 주장이 된다. 비록 잘못은 우리가 했지만, 수습은 너희가 했으면 좋겠다.

이건 곧 지옥으로의 초대장이다. 계란에게 바위로 투신하라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싶다. 안 그래도 지옥(Hell조선)을 살아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말이다. 과연 청춘들은 무슨 죄가 있길래. 나는 장하성 교수가 어른 세대에게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외려 청년 세대를 도발하고 있다. 나는 그가 차라리 어른 세대를 도발했으면 좋겠다.

너나 잘하세요

다시 말해서 어른들이 청년 세대를 자극하여 들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자기 세대를 도발하여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씨가 전도사에게 던진 힐난을 기억하실 게다. “너나 잘하세요.” 물론 (장하성 교수를 포함한) 어른 세대에게 이런 불경한 언사를 던지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청년인가? 간단하다. 어른 세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일종의 회피이다. 눈밝은 청년 독자들은 이미 장하성 교수의 책에서 그런 의혹을 느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왜 분노해야 하는가>의 서평(곽영신)에서는 “청년들에게 이 사회의 모든 짐을 지우고 정작 기성세대는 그 부담에서 빠져나가려는 의도”라고 나와 있다.

서평자(곽영신)는 장하성 교수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여러 문제적 표현에 기성세대의 속내가 반영되어있다고 추정한다. 비록 서평자의 기본 입장에는 동조하지만, 그렇다고 개혁적인 어른의 무의식을 그렇게 속단할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어른 세대의 충고와 독려, 호명과 도발에 대해 이런 비판적 반응에 공감하며, 동의한다.

각자가 자기의 몫에 전념하면 좋겠다. 어른은 어른 세대 안에서 고투하고, 청년은 청년 세대 안에서 노력하면 된다. 어른이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청년에게 떠넘기지 말자. 청년을 대상화하지 말라. 청년을 희망으로 보든 개새끼로 보든 본질은 같다. 청년 세대를 독려하거나 질책하기 전에 어른 세대 자신부터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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