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2016년 1월 18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향년 9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독문학자인 아버지 슬하에서 어릴 적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던 그는 독일로 유학했으나 교수자격시험에서 아쉽게도 낙방했다. 이후 그는 방송국과 출판사 등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대중에 감화를 줄 수 있는 동시에 철학계의 문법과도 괴리되지 않은 소설, 즉 철학과 훌륭히 결합한 소설을 쓰고자 노력해왔다.

그 노력의 충실한 결실로 탈고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투르니에의 데뷔작이자 그를 단숨에 프랑스 문단의 스타로 만든 작품이다. 이 책은 출간된 해(1967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번안한 작품인 『방드르디』는 원작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적 시각을 거꾸로 뒤집어서 서술하고 있다. 당장 원작의 제목이 주인공 로빈슨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투르니에의 작품은 원작에서 로빈슨의 하인으로 등장한 원주민 프라이데이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를 제목으로 삼고 있다.

1719년 발표된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식민지 개척을 근간으로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치며 범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가 기지개를 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로빈슨은 중산층의 안정적인 삶을 권고하는 아버지를 거스르며 자신의 치기 어린 방랑벽을 좇아 무턱대고 배를 타게 된다. 갖은 고생을 하다가 운 좋게 당도한 브라질에서 그는 제법 큰 규모의 담배농장을 운영하게 되고, 이대로라면 평생 편히 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그는 노예선의 관리인으로 함께 출항하자는 지인의 제안에 솔깃해 또 한 번 바다로 나가게 되고, 폭풍우를 만나 난파된 배의 유일한 생존자로 무인도에 떠밀려온다.

그는 당장 난파선에서 가능한 많은 물건을 섬으로 꺼내오는 한편 혹시나 있을 위험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견고한 요새를 짓는데 몰두한다. 로빈슨에게 섬을 온통 뒤덮고 있는 천혜의 자연은 도구를 만들고 개간하고 경작할 수 있는 ‘경제적 자원’으로 상정된다. 한편 육지에서는 등한히 했던 기독교에 대한 신심이 생겨나 회개하고 기도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중요히 여긴다. 그는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보다 더 나쁜 경우와 견주어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신의 은총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는 도구적 인간이자 기독교적 인간으로서 섬을 장악하고 그곳의 유일한 주민이자 영주를 자처한다.

반면 『방드르디』의 로빈슨은 섬에 대한 권력자를 자처하는 한편 자신이 도입한 서구적 질서와 무관한 ‘다른’ 섬의 존재를 계속해서 예감한다. 섬은 단순히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로 여겨지며, 로빈슨이 섬에 ‘스페란차’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원작의 로빈슨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섬을 개간하는 한편, 섬의 ‘주민’을 위한 헌법과 형법 등을 재정하는 등 서구 사회의 질서를 섬에 덧입히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혈혈단신으로 그러한 가치를 고수하려는 그의 노력은 지독한 고독에 의해 허물어질 뿐 아니라, 문명의 시각에서 ‘야만’으로 호명하는 상태, 즉 대자연의 호흡과 한데 섞여 들어가려는 동물적 본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우연히 찾아온 원주민 소년에게 그는 불어로 금요일을 뜻하는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방드르디는 처음에는 로빈슨을 주인으로 섬기고 복종하며 그가 애써 일구어 놓은 섬의 질서를 따르려 한다. 그러나 도구적 인간으로 살아본 적 없는 방드르디는 거친 대지와 뜨거운 태양, 네 발로 걷는 짐승들이 따르는 자연의 섭리에 금세 몸을 내맡기며 이는 로빈슨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섬에 온 직후부터 문명화된 자신 내부에 숨은 ‘다른’ 자신을 예감하고 있던 로빈슨은 사상누각과 같은 섬의 법령을 폐기하고 방드르디의 동지로서 생활하게 된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지만, 타인이 없는 세계는 지옥이라고 ‘명명’될 수도 없다. 『방드르디』에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로빈슨의 통찰이 담겨 있으며, 이는 방드르디라는 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에게 프라이데이는 타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도구에 불과했다. 심지어 로빈슨이 섬에서 구조된 이후 프라이데이의 향방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물론 『방드르디』의 세계에도 『로빈슨 크루소』와는 또 다른 맥락의 식민주의적 무의식이 잠재해 있다. 아프리카 등지를 식민화했던 프랑스는 1950년대 알제리 독립 전쟁 등으로 큰 홍역을 앓은 바 있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나 행정 언어로 사용하는 국가들을 언어-문화 공동체로 아우르는 ‘프랑코포니’라는 개념이 1970년대에 등장한 것도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지역을 문화적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적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방드르디를 중요한 타인으로 붙박아 놓은데는 여하한 정치 역사적 배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프라이데이이자 방드르디는 북한이 아닐까.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따위에 대한 보도가 연례행사처럼 울려 퍼지는 푸닥거리 속에서, 북한이라는 이 소중한 타인은 남한을 비롯한 세계정세를 위협하기는커녕 그것을 견고히 하는데 공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한이 내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러하듯이 말이다. 방드르디가 없었다면 고독에 사무쳤을 로빈슨 크루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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