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로 미워해도 사신은 오고갔다
[칼럼] 서로 미워해도 사신은 오고갔다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2.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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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육십갑자(六十甲子) 상 올해는 병신년(丙申年)이다. 어감 상 장애인 비하발언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에서는 ‘병신년’이라는 말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어쨌든지 병신년은 병신년이다.

연초인 만큼 ‘원숭이띠인 연예인’, ‘병신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 등이 자주 언론에 오르내린다. 이 가운데 필자는 ‘병신년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병신년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후삼국의 통일’이다. 궁예를 폐위시키고 태봉(후고구려의 뒷 이름)의 왕이 된 왕건이 신라의 경순왕으로부터 935년에 항복을 받고, 이어서 936년 후백제의 항복을 받으면서 후삼국시대를 통일한 것이 바로 ‘후삼국의 통일’이다. 936년이 바로 병신년이다.

필자가 갑자기 ‘후삼국의 통일’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사건이 병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연 ‘우리 역사상 최초의 통일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보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을 최초의 통일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고려에 의한 후삼국통일이 두 번째 통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우리는 통일신라시대를 남북국시대로 배우기도 한다. 즉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닌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라는 주장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을 통일(676년)한 후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발해가 건국(698년)되었다는 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백제와 발해 유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시에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했다는 점 등에서 ‘최초의 통일은 고려의 후삼국통일’이라는 주장의 한계도 보인다. 또한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아직도 ‘신라’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학계와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역사 교과서에 ‘최초의 통일’과 ‘남북국시대’가 모두 집필되는 것은 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충분히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제발 ‘획일적 역사교육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박물관에 넣어두자!)

또 필자가 “후삼국의 통일”은 언급하는 것은 신라와 발해의 관계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단일민족국가가 한반도 안에서 이어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된 상태, 발해의 영토가 현재 북한과 중국에 속해있다는 점 등 때문에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발해의 역사는 엄밀히 우리 역사의 일부로 교육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시대 내내 세 나라 사이에 있었던 합종연횡의 다이내믹한 역사는 배울 수 있지만, 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매우 짧게 배우고 있다.

우리가 배우는 신라와 발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짧은 내용을 더 짧게 서술하면 ‘적대를 바탕으로 하는 교류’라고 할 수 있다. 신라와 발해의 관계가 우호적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임을 천명했고,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그런 발해가 고구려를 무너뜨린 신라를 좋아했을 리는 없다. 또한 발해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당(唐)이 신라와 우호적이었고, 발해와 우호적이었던 당시 중원의 소수민족과 대립적인 관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 관계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노르웨이의 한국학자 박노자 교수는 신라가 발해를 이민족의 국가, 야만의 국가로 규정하고 배척했다는 것을 주장했다. 실제로 발해 무왕 때 발해가 중국의 덩저우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당이 발해를 침공했을 때 당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실제로 신라는 군대를 파견했다가 추위와 눈으로 실패하기도 했다(733년).(「발해-신라관계」,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가람기획.)

이렇게 대립적인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사이에는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790년(원성왕 6)과 812년(선덕왕 4) 두 번에 걸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이는 발해의 국력이 발전하고 강해졌던 문왕 때의 일이다. 이전까지 두 나라 사이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고 전쟁 직전까지 갔던 상황에서 신라가 20여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신라가 발해의 강화에 대해 주시하고 발해의 내부사정과 신라에 대한 태도를 탐지하면서 겉으로는 친선관계를 유지해 나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발해 5소경 중의 하나인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가 「신라로 가는 길」로 돼 있는데, 이는 두 나라 사이에 지속적인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발해-신라관계」,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가람기획)

설날 연휴가 시작되는 시점에 북한의 탄도 로켓을 이용한 위성 발사 소식이 전해졌고, 이어서 개성공단 폐쇄가 발표됐다. 국가의 존립은 정치, 경제, 외교 등 많은 것을 고려하면서 이어져야 하고, 북한의 행위는 분명히 주변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와 교류는 이어져야 한다. 신라와 신라가 무너뜨린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발해에 살았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도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서로 사신은 오고갔고, 서로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은 했다. 하물며 수구정권 10여 년간 계속 실패했던 강경드라이브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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