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조선시대가 전제군주정 체제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시대의 왕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3정승으로 구성된 의정부와 정책에 대한 협의를 해야 됐고, 아예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가 따로 있었으며, 왕은 이들의 간언(諫言)을 무시하면 폭군(暴君)이라는 낙인을 피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왕에게 정책에 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상소(上疏) 제도까지 있었다. 상소는 원칙적으로 백성이라면 누구나 올릴 수 있었으나, 전직 관리와 유생(儒生)들이 상소를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유생들은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걸고 상소를 올렸고, 이 때문에 왕은 유생의 상소를 업신여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소 가운데 왕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만인소(萬人疏)였다.

만인소는 말 그대로 만여명의 사람들이 연명하여 올린 상소를 뜻한다. 그런데 연명한 사람의 수를 딱 만 명에 맞추는 것은 아니었다. “만(萬)”이라는 말 자체가 숫자 1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우 많은 수”를 뜻하기도 한다. 만인소는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처음에는 연명하는 인원이 수백명에서 천여명 안팎이었다. 그렇지만 점차 그 수가 늘어나서 나중에는 만여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수건의 연구에 따르면,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 유학 이우(李堣)를 상소 연명자의 우두머리로 한 영남유생 1만 57명이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건의한 상소였다. 이후 1823년(순조 23) 경기·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의 유생 9996명이 서얼(庶孼)도 차별 없이 임용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1855년(철종 6)에는 경상도 유생 1만이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追尊)을 요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 가운데 최초의 만인소의 경우 조정에서 그 내용을 거의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이 상소는 장헌세자(사도세자) 30주기를 맞아서 올린 만인소로, 제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에게 장헌세자를 모함해 죽음으로 이끈 노론 벽파(僻派)의 역적들을 처벌하고 장헌세자의 무고함을 명백히 알릴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인소를 받은 정조는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으며, 이에 영남 유생 1만368명은 5월 7일에도 재차 ‘장헌세자 신원 만인소’를 올렸다. 이로써 정조는 이 상소의 주도자인 유생 이우를 의릉참봉(懿陵參奉)으로 삼는 등 영남의 사림(士林)들을 관직에 등용하며 노론 세력을 견제했다.

가장 유명한 만인소는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1만 명의 영남 유생들이 퇴계 이황의 후손이자 이휘병의 아들 이만손(李晩孫, 1811~1891)을 필두로 연명해 제26대 임금 고종(高宗, 1852~1919)에게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것은 청나라 공사관인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에 대한 유생들의 분석과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황준헌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에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 조선이 중국, 일본, 미국과 연계해야 되고, 기독교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영남의 유생들은 일본은 바다의 요충지를 점유하고 있고, 미국은 멀리 있는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며, 아무런 혐의가 없는 러시아를 자극해서 외침을 초래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폈다. 특히 기독교의 수용에 반대해 기존의 성리학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주장했다. 한 마디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것이다.

이 만인소는 역대 만인소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만인소였다. 이 만인소의 여파로 유생들은 지속적으로 상소를 올렸고, 고종은 사교(邪敎)를 배척한다는 내용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했다. 그러나 조정 비방의 죄목으로 이 만인소를 주도했던 이만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만인소를 비롯한 상소는 조정에게 직접 정책에 대한 의견을 직접 피력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대의정치(代議政治)가 작동하고 있는 현대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이 직접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것은 투표하는 길 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이 직접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방법이 과거에 비해 더 줄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서명운동이나 탄원서 제출 등이 있지만, 이것은 상소에 비해서는 그 영향력이 더 적다.

국민의 상소를 대신해서 국민의 투표에 의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많은 토론을 한다. 그리고 최근 야당의 국회의원들이 “테러방지법의 독소조항을 없애서 테러방지를 명목으로 국가정보원이 과도한 권력을 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필리버스터(무기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를 진행 중이다. 필리버스터는 “현대판 시간 중심의 만인소”이고, 만인소는 “과거판 인원수 중심의 필리버스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나 현재나 공통적인 것은 “만인소의 인원수”나 “필리버스터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인소나 필리버스터가 “왜”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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