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지난 20일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가 향년 8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1986년 영화화된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작가’로 규정짓기는 무색할 정도로 다방면에 해박한 지성과 반짝이는 통찰이 돋보이는 ‘지성인’ 중 한 명이었다.

국내에 번역된 에코의 책만 해도 수십 권에 이르기에 이를 모두 섭렵하기란 녹록치 않다. 그러잖아도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은데 한 작가가 이토록 다작을 남겼다니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야흐로 에코와 같은 이로 대표되는 지성인의 멸종이 멀지 않아 보인다. 오늘날은 지적으로 깊고 치밀한 책 한 권 남기기도 어려울뿐더러 다작을 한들 ‘넓고 얕기’ 일쑤다. 이런 실정이라 에코의 타계에 많은 이들이 유난히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닐까.

에코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장미의 이름』 뿐 아니라 『푸코의 진자』나 『로아나』 등 방대한 도서관적인 지식을 뽐내는 장편 소설을 펼쳐드는 것도 좋지만, 언제 읽어도 재기 넘치는 에세이들이야말로 에코의 진수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잡지에 연재한 칼럼을 엮어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은 에코 특유의 농담이 진득하게 녹아 있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데카트르가 말했던 것과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그러니 사람 수만큼 편재한 어리석음에 일일이 격분하거나 진지하게 반응하다가는 삶의 열정을 모조리 소진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소모적인 분노를 우회해 말 그대로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기내식을 먹는 방법>에서는 비즈니스석의 좁은 좌석과 작은 탁자에도 불구하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옷을 더럽힐 염려가 없는 음식과는 정반대의 메뉴를 제공하는 비행기를 탄 저자의 항의 같지 않은 항의를 들을 수 있다. 평지에서도 수월하게 집기 어려운 삶은 완두콩이나, 잡기가 무섭게 산산이 부서져 바지 밑에 온통 가루를 남기는 빵 같은 것들. 에코는 “모름지기 포크란 완두콩을 그러모으는 척하면서 접시 밖으로 떨어뜨리는 데에 쓰자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며 너스레를 떤다. 부서져 가루가 되어 버리는 빵도 겉보기에는 사라진 것 같지만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고스란히 남아 있어 엉덩이 밑에 모여 있다가 바지에 달라붙어 있기 십상이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방법>은 또 어떠한가. 1982년에 쓴 이 칼럼에서 에코는 해외에서 분실한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으며 겪은 고국 이탈리아의 터무니없는 행정절차를 우스꽝스럽게 폭로하고 있다. 이탈리아 도로 교통 협회에 따르면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으려면 분실한 운전 면허증 번호를 알려 주어야 하는데, 그 번호는 오로지 잃어버린 내 면허증에만 나와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지인들을 수소문해 몇 개월만에 면허증을 발급받는데 성공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의 운전 면허증이 비교적 허술한 인쇄술로도 얼마든지 위조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칼럼이 실린 후에 이탈리아 당국이 행정 절차를 간소화했다고 하는 추신을 통해 그의 글이 어느 정도로 호응을 얻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에코는 어리석음에 유쾌하게 대항하는 무수한 방법들을 통틀어 ‘패러디’로 정의한 뒤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패러디는 과장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패러디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낯을 붉히지 않고 태연하고 단호하고 진지하게 행할 것을 미리 보여 줄 뿐이다.” 그러니까 당장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들을 ‘미리’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보이는 태도를 일컫는다. 읽다보면 웃음이 나오거나 무릎을 치게 마련인 저 발랄하고 가벼운 칼럼들이 실은 꽤 굉장한 방법론을 내장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우스꽝스럽게 여겨질 것들로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 에코를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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