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전에 살던 아파트 얘기다. 그 아파트는 두 동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곳이었는데, 세대 수에 비해 주차장이 넓었기에 인근에 있는 식당들한테 돈을 받고 그 식당에 오는 차들을 세우게끔 해줬다. 한 달에 300만원 정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3년 정도 모으면 1억을 넘는 돈이니 잘만 쓰면 아파트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입주자 대표가 문제였다. 그는 그 돈으로 자기 앞으로 날아온 세금을 내고 카드 대금을 결제했으며, 자기 밑에서 일하는 다른 입주민들한테 떡값도 팍팍 주는 등 한껏 기분을 냈다. 그렇게 유용한 돈이 7천만 원 정도,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입주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설문조사 결과 당장 대표를 고발해야 한다는 응답이 90%를 넘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대표를 어떻게 응징할지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당황한 대표는 타협을 시도했다. 5천만 원 정도를 물어낼 테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아 달라는 것. 비대위가 여기서 만족할 리는 없었다. 그들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대표를 고소했다.

그 이후부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비대위 측은 주당 3-4회씩 모였고, 식사비와 복사비 등 그때마다 적지 않은 돈이 회의비로 들어갔다. 재판이 끝나려면 몇 달 이상 걸릴 테고, 변호사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앞으로 걷히는 주차비는 죄다 그 비용으로 들어갈 판이었다. 게다가 비대위는 아파트 앞에다 현수막을 걸었는데, ‘몇 동 몇 호에 사는 누구누구는 유용한 돈 7천만원을 토해내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이 될 수 있기에 대표는 당장 고발을 했고, 현수막은 몇 시간도 안 돼 철거됐다. 비용이 얼마 안된다 하더라도 자기 돈이었다면 과연 그런 일을 벌였을지 의문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날 때까지 비대위가 회장 측으로부터 받아낸 돈은 없었고, 그 뒤 난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가서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간 아파트는 A시에 새로 지은 아파트였다. 아파트의 큰일들은 대부분 열 명의 동대표로 이루어진 입주자대표위원회(입대위)에서 처리됐고, 거기서 뽑힌 회장이 그 회의를 총괄했다. 그것과는 별도로 인터넷 사이트에 아파트 주민들이 주축이 된 카페가 개설되어‘개똥을 왜 안치우느냐’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자’ 같은 소소한 의견들이 올라오곤 했다. 하지만 그 인터넷 사이트가 입대위에 대한 비판의 장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업체에서 관리를 하는 게 정상인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업체가 관리업체로 선정된 것. 알고보니 입찰 과정에 문제가 많았고, 입찰 자체가 특정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요식행위였다. 설치업체이자 엘리베이터의 전문가인 엘지 오티스는 아예 입찰에 참여조차 하지 못했다. 구청에선 ‘재입찰’을 지시했지만, 입대위 측에선 “정당했다”고 핏대를 세우고 있는 중이다.

도로 옆에 세워질 방음벽도 문제였다. 아파트 바로 옆에 고속도로에 준하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가 있어서 무척 시끄러워, 방음벽이 반드시 있어야 했다. 원래는 음을 흡수하는 기능이 있는 투명 방음벽을 설치해 주기로 했지만, 방음 기능도 떨어지고 보기도 나쁜 불투명한 방음벽을 입대위 측에서 덜컥 수락한 것.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건 당연했고, 인터넷 사이트엔 연일 입대위와 회장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인터넷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분이 그 중심에 섰다. 이쯤 되면 회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만도 한데, 회장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며 전의를 불살랐다. 심지어 회장 부인은 항의차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못배운 것들이...”라며 짜증을 냈다. 회장이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짐작할 만했다. 회장이란 자리가 뭔가 생기는 게 많았으니까. 동대표들이 회장의 지시를 따랐던 것도 회장이 나눠줬을 부스러기 때문이었을 테니, 그들이 아파트 주민의 편에 서기보단 아파트 시공업체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던 것도 이해는 간다.

그 뒤 천안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비대위와 입대위의 한판승부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지만,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깨달은 건 이 아파트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실상 우리나라 정치의 축소판이라는 거였다. 권력을 잡은 이들은 마음껏 떡고물을 탐하며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해 새로 권력을 잡은 이들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기득권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 우리가 숱하게 많이 겪은 일들이 아닌가. 정권교체가 세상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정권을 주고받았지만 민중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는데, 이건 정권교체가 그들만의 권력다툼에 불과했을 뿐 국민은 별로 안중에 없었단 증거이리라.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그 나라 국민수준을 대변한다. 아파트를 매개로 한 조그마한 이익에도 입주자 대표가 쉽게 눈이 먼다면, 그보다 몇 만, 아니 몇 십만 배가 넘는 이익에 정치인들이 혹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입주민들로 이루어진 조그만 아파트에서 편을 나눠 극심한 다툼을 벌이는 게 나름의 이유가 있다면, 그보다 훨씬 큰 여의도에서 정치인들이 편을 나눠 싸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는 정치권을 향해 “싸움질만 한다”고 비판하기 바쁠 뿐,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는 인색하다. 정치권을 변명하자는 건 아니다. 그네들에 대한 비판과 감시도 분명 필요하겠지만, 자기가 속한 모임 안에서부터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작은 물줄기가 모여 큰 강이 되는 것처럼, 작은 모임들이 제대로 굴러가야 국가의 정치도 개선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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