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구글은 국제자본시장에서 사업적으로 빛나는 일대기를 써가는 중이다. 알파고를 개발한 하사비스는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천문학적 금액의 인수 계약서에 사인 했다. 이세돌은 그의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이 모든 것을 알려주듯이 인간으로서 극에 다다르는 능력만을 갈고 닦은 개인이다.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에서, 이들은 자본주의 시대가 바라보는 만화경 속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대립항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대국을 두고 구글 장사에 이세돌이 말려들었다거나, 공정한 승부가 아니라거나, 사과를 받아야 한다든가 하는 비난들이 있다. 그 비난의 뒤에 더러는 용처 없는 민족주의가, 더러는 기계문명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구글 설립자 세르게이 브린과 알파고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 그리고 바둑기사 이세돌은 동업자다. 나아가서 동료다. 이 세사람은 인류가 수 만년 전 돌도끼를 만들던 무렵부터 해왔던 것처럼, 인간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픈 열망에 봉사하는 중이다. 그 것은 어떤 당위에 근거한 행동이 아니며 유희에 지독하게 몰입하려 한 의지의 결과다. 그와 같은 몰입은 인류에게 천체물리학자, 고고학자, 수학자, 통계학자, 성직자, 소설가, 예술가 그리고 오타쿠 등등을 선사했다.

인간은 수많은 직군에 개별로 종사하면서도, 자신이 속한 종이 먼 훗날 무엇에 도달하기 위해 구성원인 나를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은 피하고 싶어한다. 인류라는 존재의 연속성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찰나의 개체인 내가 너무 소모적이라 비참하고, 목적 따위 없다고 하기엔 나의 존재가 지독하게 무의미 해 공허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도모하는가. 이 질문은 대다수에게 우울하며, 따라서 당대의 행위자로서 오늘을 살 뿐이란 도피가 종종 위안이 돼 주기도 한다.

만약 인류가 단 하나의 몸으로 존재해 수 십만 년 동안의 모든 경험과 기억을 하나의 뇌에 모조리 축적 해 왔다면, 단일 종 단일 개체로서의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폭발적인 지적성장을 경험 했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영생에 가까운 생명력이 필연적이지만, 자연은 한 개체의 죽음이 곧 그 종 전체의 멸절이 되는 비효율 앞에서 도박하지 않으므로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개별적 능력을 가진 복수의 개체가 모여 진화 협력체라는 집단을 이룬다고 했을 때, 인류멸종 최후의 그날까지 인간 개개인은 진화의 최선봉에 서 있을 수 밖에 없다.

일회성 생명을 가진 개체에게 진화란 생애 동안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대체로 물리적 속성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오래 전 뇌에 폭발적 진화압력이 가해진 이후, 인간은 신체의 진화 속도에 비해 사고의 도약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됐다. 사고의 도약은 매번 한계점을 새로 맞닥뜨리게 한다. 사고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죽는 날까지 끝없이 무지의 영역을 찾아 헤매며 ‘모르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모르는 것을 판단함으로써 세계 속의 자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 만큼 파악이 가능해지는 것. 그 것이 인간이 세계를 정의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이해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해하고 정의한다는 것, 즉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는 상관없는 별개의 사건이다. 모른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거기 있다는 것 조차 깨달을 수 없는 상태이므로, 아는 게 생겼다고 해서 모르는 게 감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를 수 있다는 의심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떠한 진화와 발전이 눈 앞에 다가오더라도, 설령 그것이 완벽한 파악이라 불리워도 인간은 누적된 세계의 외부 - 모르는 세계 - 를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순수한 의심, 즉 호기심과 몰입이야 말로 인간이 발전하게 되는 강력한 계기다.

우리는 어쩌면 “질문이 무엇인지를 확인 하기 위해 답을 찾는 여행”을 영원토록 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인류가 역사를 기록해 온 이래의 결과물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을 정의하려 노력하는 거란 사실을 가리킨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수리를 연구하거나 상상을 하거나 해부를 하며 자아를 다져간다. 그리고 그 것들이 모여 피라미드를 쌓게 만들고, 태양계 밖으로 인공물을 쏘아 보내며, 노트북 정도의 무게에 불과한 1.5Kg짜리 뇌를 탐험하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인간과 인공지능 간의 바둑 대국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이 대국의 속성에 대한 단편적인 비난은, 탐구행위가 본래 순수한 의심으로부터 빚어진 발전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겨난 부잡스러운 평가다.

인간은 목적을 위해 목표를 세우지만, 그 목표는 인류가 달려가는 코스의 한 구간을 차지할 뿐이다. 인간이 그 구간을 효과적으로 달리게 만드는 가장 큰 에너지는 호기심과 몰입이며, 그 에너지로 인해 인류는 항진한다.

따라서 구글의 사업적 완결성에 대한 추구와, 하사비스의 무결점 인공지능에 대한 추구와, 이세돌의 최선의 길을 뚫는 수에 대한 추구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순수한 의심이다. 단지 매 구간은 여전히 위험하고, 그렇기에 안전을 꾀해야 할 사명이 각자에게 있을 뿐이다.

구글이 애초에 앳된 프로그래머들끼리 신나게 코딩 짜며 밤을 새다 보니 돈을 벌게 됐다는 사실과, 하사비스가 너무 많은 호기심을 꺾지 못하고 온갖 재미난 아이디어에 매달렸다는 사실과, 이세돌이 오로지 뇌에 피어오르는 집념에 몸을 맡기느라 생을 보내는 중이란 사실이 가지는 의미에 공감 할 수 없는 인생은 있을 수 있다. 그 인생에도 진화의 부담은 동일하게 지워져 있다.

하지만 모종의 순수함에 대한 비난들을 바라보며, 사람은 자신이 모르지 않는 것만큼만 이해하고, 그렇기에 모르는 것에 대한 염원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기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우리는 인류발전 시장에 항상 무언가를 내 놓는 동업자들이자 동시에 인류 주식회사에 종사하는 동료들이다. 단지 우리들 중 누구도 우리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정확히 모를 뿐이다. 이유를 모르니 어쩌면 결과도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승패의 가치도 중요치 않다. 우리는 지금 동업자들의 이벤트를 보고 있으며 그 안에서 동료의식이 일궈내는 진전을 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로써 이세돌과 알파고의 마지막 5국. 그저 한걸음 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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