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나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운 좋게 살아남았다” “23년을 운 좋게 버티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20일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는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범행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는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애도의 마음을 담은 포스트잇과 하얀 국화꽃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앞서 지난 17일 오전 1시 7분경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한 노래방 건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A(23)씨가 한 남성에 의해 왼쪽 흉부 등을 흉기로 수차례 찔려 살해당했다.

이에 다수의 시민들이 “단순한 묻지마 범죄가 아닌 여성을 노린 ‘여성혐오’ 범죄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현재까지 경찰은 이번 사건의 동기가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피해 망상이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다소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남역은 추모 현장을 찾은 수많은 시민들로 붐볐다. 어린 학생부터 직장인, 대학생 등 남녀노소 모두가 피해 여성의 안타까운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특히 수천 개의 포스트잇 사이에서 언젠가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하는 문구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여대생 정모(23) 씨는 “이번 사건이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우리나라 여성 혐오의 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이다”라고 입을 열었다. 이어 “사실 이번 사건이 뉴스에서 크게 대두돼 추모행사가 일어난 것이지 예전부터 이런 범죄는 많이 발생했었다”라며 “이번 사건이 이슈화돼서 범죄 원인이 더 이상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직장인 고모(29) 씨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범행 방식이 분명 여성 즉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성 혐오에 대해 남자들이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모든 이유를 다 떠나 가장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 여성의 죽음을 추모하는데 한마음 한뜻을 모으는 것이라는 시민도 있었다.

직장인 이모(33) 씨는 “여성혐오나 남성혐오를 다 떠나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이 모아졌으면 좋겠다”라며 “이번 사건이 증오가 아닌 사회 시스템적으로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지 논의되는 것이 먼저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날 여성 시민들 중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얼굴을 가린 이들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기 꺼려한 한 여성은 “인터넷에서 추모현장에 나오는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 공격하겠다고 해 주변에서 모자를 쓰거나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주위에 남성들을 경계하게 됐다. 이곳을 방문한 남성들 가운데 혹시나 추모 의도를 변질되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라며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한편 지난 19일 경찰은 피의자 김씨를 구속했으며, 프로파일러를 투입해 김씨를 대상으로 면담을 진행해 정확한 범행 동기를 조사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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