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얼마 전 인공지능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해 앞으로 유망한 직업을 찾는데 골치를 썩게 될 것 같다. 이 자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많은 분야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만큼 인공지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할 만한 변화가 예상된다. 지금까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권하고 있는 직업이, 다음 세대에는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주어야 할 분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의사·법률가 같은 직업부터 문제가 된다. 현재로서야 이 분야가 사람들이 절실한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으니,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을 보장받는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이런 분야가 인공지능에 점령당할 공산이 더 크다. 그러니 직업을 찾아야 하는 청년들은 물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까지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인공지능에 점령당할 분야를 꼽아보면 일정한 특징이 있다. 바로 창의적 능력보다, 주어진 정보를 숙지하고 필요한 부분에 정확하게 적용시키는 능력이 강조되는 분야라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면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창의적 분석이 요구되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뛰어넘기 어려운 분야라는 뜻이다. 이런 분야도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정복해버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유망직종 따위를 따지는 일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아예 인간 존재의 의미부터 문제가 될 테니까.

그러니 인문학이나 예술 분야가 인공지능에 대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마지막 보루 같은 분야가 될 것이다. 사실 지금도 스포츠나 대중 예술 분야는 활성화되어 많은 인재들이 몰린다. 과거와 달리 청소년들이 공부 포기하고 연예계나 스포츠 분야에 전념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도, 그만큼 높아진 이 분야 위상을 반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을 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인재들이, 사회를 이끌어 나아가는 분야가 아니라 놀고 즐기는 분야에만 몰리는 현상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일리가 없지는 않다. 스포츠나 대중 예술의 위상이 아무리 높아진다 하더라도, 이런 분야가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분야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는 것 자체는 당연할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의 미래를 인공지능에 맡긴다는 발상이 아직은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런 분야까지 인공지능에 맡겨버리면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쓸모없어진 인간이 사냥당하는 세상이 될 테니까. 이렇게 보면 사회의 이끌어 나아가는 요소를 연구하는 인문학 분야가 앞으로 유망직종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극히 일부에 불과한 교수직 등을 제외하면, 인문학 분야의 직업 상당수가 유망직종이라고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유는 분명하다. 인문학 분야가 활성화되려면, 자유롭게 의견이 제기되는 대신 철저한 검증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통해 되지도 않은 의견은 철저하게 도태시키고, 필요한 내용이 걸러져 사회의 방향을 결정한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가 되어야만 인문학이 사회적으로 그 필요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점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자유롭게 의견이 제시되는 것 같지만, 막상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위치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눈가림으로 검증하는 척 하지만, 내막을 보면 대부분 권력 쥔 쪽이 내려놓은 결론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끼워 맞춘다. 반대 의견 가진 사람 원천적으로 제외해놓고, 검증 같지 않은 검증을 하는 것도, 힘있는 쪽에 유리하게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는 수법의 하나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결정에 필요한 내용 이해나 체계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필요할 리 없다. 그저 윗분들이 결정해놓은 내용을 미천한 것들이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눈속임 잘하는 자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니 인문학 분야에서 훌륭한 인재를 그리고 찾을 필요도 못 느낄 것이고, 기용할 리도 없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하고,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기 어려운 인문학이 ‘천하에 쓸모없는 분야’ 취급을 받는 주요 이유가 이런 것이다. 당연히 인재가 배출될 턱없고, 이 분야 뛰어들겠다고 몰려올 리도 없다. 사실 정말 인문학 분야에 자질이 뛰어난 인재라면, 미리 이런 상황 감 잡고 다른 분야로 방향을 틀어버릴 것이다.

역사학계만 하더라도 학회에 가 보면 중늙은이들 위주로 돌아간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눈에 띈다 싶으면, 대개 이런 저런 연줄로 동원된 인원이라 오래 볼 사람 아니다. 이런 상황 보면서 ‘10년 후가 걱정된다’며 한탄하는 원로들을 보면 속이 뒤집힌다. 젊은 친구들이 뛰어들어봐야 암울한 장래밖에 남을 것 없는 상황을 누가 만들어놓고 남의 얘기하듯 하는지.

이런 꼴 보면 무엇 때문에 ‘놀고 즐기는 분야’에 인재가 몰리는지 이해가 간다. 이런 분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어서 되지도 않는 능력으로 나서기 어렵다. 실력 안 되는 선수가 운동장에 나서거나, 노래도 춤도 안 되는 가수가 무대에 올랐을 때 대중들이 보일 반응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거룩하신 분들이 결정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분야에 비해 자기 힘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인재가 희망을 가지고 뛰어들 수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지 생각해 보면 섬뜩해진다. 사실 스포츠나 연예계 스타들은 화려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이른바 ‘을’의 입장이다. 아무리 이 분야 능력이 출중해도 궁극적으로는 대중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있어 봐야 사회를 이끌고 나아갈 위상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에서 자기 힘으로 성공할 수 있는 여지는 이런 분야에 집중돼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저 ‘사랑해주세요’ 밖에 못하는 분야는 자기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게 풀어줘 놓고, ‘이렇게 능력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고 생색낸다. 그러면서 정작 국가사회와 여기 소속된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야는 철저하게 기득권자들이 손아귀에 틀어쥐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놀고 즐기는 분야의 능력 검증에만 관심이 쏠리는 풍조에도 의식해야 할 점이 있는 것 같다. 힘든 세상 살면서 위안거리에 관심 갖는 게 나쁠 것은 없겠지만, 위험 하나만은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불편한 분야에 관심 꺼버린 사이에 우리의 운명은 끔찍한 캐릭터들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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