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삼국지는 중국 진나라의 진수(陳壽, 233-297)가 쓴 『삼국지(三國志)』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소설이 워낙 유명해서 진수의 『삼국지』 앞에는 정통역사서라는 의미를 지닌 ‘정사(正史)’가 붙는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정사에 등장하는 사람이므로 소설만 읽은 독자들한테는 생소한 느낌을 줄 것으로 짐작한다.

● 시의(是儀)

“저한테는 장수의 재능이 없습니다.”

시의는 공융이 다스리는 북해 지역의 말단 관리였다. 원래 성은 ‘씨(氏)’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씨의’인 셈인데, 공융이 성을 ‘시(是)’로 바꾸라고 하는 바람에 ‘시의’가 되었다.

“ ‘씨’는 ‘민(民)’에서 머리가 없는 글자인데, 어떻게 머리가 없는 글자를 쓰느냐.”

이 일화를 두고 『삼국평(三國評)』을 쓴 서중(徐衆)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공융이) 시의더러 성을 바꿔서 근본을 잊고 조상을 속이게 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공융은 남의 성을 바꾸게 했고, 시의는 남의 말에 따라 족보를 고쳤다. 이것은 우선 공융의 잘못이지만, 시의한테도 잘못이 있다.”

상관이 성을 바꾸라고 하니, 그 말을 순순히 따른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짐작을 해 본다. 이 일 때문이었을까. 시의는 공융을 떠나 유요한테 간다. 이후 유요가 손책에게 죽자 회계 지역으로 피난 갔다.

손책이 죽자 동생인 손권이 대업을 잇게 됐다. 손권은 은거하고 있던 시의한테 간곡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 자신의 진영으로 초빙했다. 시의는 부름에 응해 손권의 사람이 되었다. 손권은 시의를 신임해서 나라의 기밀을 맡겼다고 한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지역의 말단 관리 경력을 지니고 있고, 적의 진영에 있던 사람을 신임한다? 손권은 시의의 어떤 점을 보고 신임했을까.

어찌되었건 손권의 눈이 옳았다는 점은 이후 시의의 행적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219년, 손권은 관우를 공격했다. 이 계획은 여몽과 육손이 세웠는데, 손권은 시의한테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시의는 둘을 칭찬하면서 그 계획에 따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관우 공격에 참가했다.

손권은 관우가 다스리던 형주를 점령하고 수도를 옮긴 후에 시의한테 병권을 맡기려 했다. 시의는 사양했다.

“저한테는 장수의 재능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시의는 위나라 군대가 침입했을 때 적장 조휴를 무찌른 일도 있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편장군’ 벼슬을 받았다. 군사전략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 사람은 전략보다 내정·교육·사법 등 문관계통의 일에서 더 큰 장점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손권은 시의한테 궁궐의 대소사를 맡겼으며, 관원을 관리하도록 했다. 나라의 소송을 처리하게 했고, 왕실의 공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했다. 손권의 태자 손등은 시의를 존경하여 무슨 일이든 생길 때마다 우선 시의한테 자문을 구했다. 시의는 이후 법관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맡은 일에 충실했던 사람”

관리의 위법행위 여부를 감찰하는 여일이라는 사람이 있다. 여일은 강하태수 조가라는 사람이 나라의 정치를 헐뜯었다며 손권한테 무고를 했다. 손권은 여일의 말만 믿고 조가를 옥에 가두고 문초를 했다. 이 때 조정에 있던 관리들은 모두 여일을 두려워한 나머지 실제로 조가가 그런 말을 했다고 진술해 버렸다. 그런데 시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시의는 며칠 동안 조사를 받았고, 손권의 조서는 점점 더 엄해졌다. 여일의 손을 들어줬던 신하들은 모두 시의 때문에 긴장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의가 손권한테 회답했다.

“지금 저의 목에 칼과 톱이 들어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감히 조가를 위해 사실을 숨겨서 스스로 죽음을 취하여 불충한 신하가 되겠습니까! 다만 들어서 아는 것에는 마땅히 자세한 정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의는 사실에 근거해서 물음에 답했고, 말을 바꾸는 일도 없었다. 손권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시의를 풀어주었고, 조가 역시 사면했다. 이처럼 시의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었다.

시의는 가끔씩 손권한테 나랏일에 대해 건의를 할 때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일관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이자 손권이 말했다.

“당신은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옳고 그른 것도 없는 것 같소.”

시의가 대답했다.

“성스런 군주가 위에 있고, 신하는 직무를 행하면서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감히 어리석은 말로 군주의 귀를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시의는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결과로 시의는 수십 년 간 손권의 신하로 있으면서 한 번도 고발당하지 않았다. 손권은 감탄했다.

“만약 사람들 모두가 시의와 같다면 무엇 하러 법령을 쓰겠는가!”

“시의는 검소한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벼슬아치의 기본 덕목으로 ‘검소함’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많은 벼슬아치들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느 날 손권은 궁궐을 나왔다. 멀리 보니 시의의 집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저 큰 집을 짓는 사람은 누굴까?”

“시의가 아닐까요?”

“시의는 검소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집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알아보니 시의의 집이 아니었다. 시의는 벼슬아치였지만 자신이 살만한 크기의 작은 집을 지었고, 남들한테 무언가를 받지도 않았으며, 조정의 일 이외의 다른 일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시의는 일상생활에서도 검소함을 실천했다.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고, 많은 요리를 먹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느라 집에는 쌓아놓은 재물이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손권이 시의의 집에 왔을 때, 시의가 먹는 음식을 맛보고는 탄식하면서 봉급을 올려 주고 상을 내려주기까지 했다. 시의는 죽을 때까지 검소해서 병으로 누웠을 때, 소박한 관을 쓰고 평상복으로 자신의 시신을 염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살펴본 것처럼 시의는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품성을 모두 지닌 사람이었다. 손권의 신하가 되었을 때의 행적을 보면, 이전에 공융과 유요한테 있을 때에도 성실하게 일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확인하지 않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남을 참소하지 않았다. 맡은 바 직무에만 충실하려 했으며, 자신의 능력을 알고 높은 벼슬을 사양했다. 궁궐 내부의 기밀관리, 내정, 교육, 사법 등 문관계통의 일에 두각을 나타냈다. 여든한 살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던 유능한 사람이었다고 하겠다.

   
 

● 더불어민주당 조응천(趙應天) 의원

“네 명의 대통령이 인정한 사람”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이하 조응천으로 표기)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시의처럼 큰 탈 없이 공직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92년부터 1999년 까지 검사직을 수행했고, 2000년,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 재임하시던 시절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행정관으로 근무했다. 검사직을 그만 둔 후에는 잠시 ‘김앤장’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2006년에서 2007년까지,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재임하시던 시절에는 법무부장관 정책보좌관 직을 수행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던 2008년에서 2009년까지 국가정보원장 특별보좌관을 했고, 이후 18대 대선 기간에는 박근혜 캠프에서 네거티브대응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201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법질서사회안전분과 전문위원으로 있었으며, 이후 박근혜 대통령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을 했다.

여기에서 시의와 조응천의 다른 점이 나타난다. 시의는 손권의 부하가 된 후에 두각을 드러냈고, 조응천은 의원이 되기 전 이미 자신의 능력을 네 명의 대통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이 행적 외에는 상당 부분이 서로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시의는 법관이었고, 조응천 역시 법조계의 인물이었다. 시의는 손권의 기밀을 취급했으며, 조응천 역시 그러했다.

조응천은 네 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도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이 사람은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했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런 조응천의 이력을 두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행동한 사람’, ‘소신 없는 사람’, ‘복지부동하는 공무원’이라고 혹평을 할 수도 있겠는데, 공직을 그만 두고 의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준 조응천의 언행을 살펴보면 그렇게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정치인의 정치적인 언행을 온전히 다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으나,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해 볼 수밖에 다른 근거가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든 이처럼 화려한 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조응천은 대중한테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공직에 있으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 사람이 정치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이른바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사건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근무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건의 어떤 것이었던가? 내용을 살펴보겠다.

2014년, 11월 신문기사 한 꼭지가 정국을 뒤흔들었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교체설’은 정윤회(59)씨가 자신의 비선라인을 활용해 퍼트린 루머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 27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청와대 내부 문건에 따르면 공직기강비서관실은 올 1월6일 ‘靑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동향 감찰 보고서를 작성했다.”

“정씨는 이들과 매달 두 차례 정도 서울 강남권 중식당과 일식집 등에서 만나 청와대 내부 동향과 현 정부 동향을 논의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모임에는 소위 ‘비선 실세’로 불리는 이재만(48) 총무비서관과 정호성(45)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48) 제2부속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 내부 인사 6명,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청와대 외부 인사 4명이 참석한 것으로 조사됐다.”

“정씨는 지난해 이들과의 송년 모임에서 김 실장의 사퇴 시점을 ‘2014년 초·중순으로 잡고 있다’면서 참석자들에게 정보지 관계자들을 만나 사퇴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보를 유포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 보고서는 경찰 출신 A경정이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 지시로 작성했고, 김 실장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감찰 보고서가 제출된 지 한 달 만에 A경정은 원대 복귀했고, 조 비서관은 그로부터 두 달 뒤 사표를 제출했다.” <이상 2014. 11. 28. 세계일보 기사 발췌수록 함>

청와대는 즉시 세계일보를 고소했고, 동시에 내부감찰을 실시하여 조응천을 비롯한 일곱 명이 문건을 유출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조응천에게 문건유출 혐의 및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 등을 적용해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됐다. 이후 조응천은 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조응천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죄를 확신합니다. 출석 요구를 받고 검찰에 왔을 때부터 저는 한시도 부끄러운 적이 없었습니다.”<2016. 4. 29.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사실에 근거해서 물음에 답했고, 말을 바꾸는 일도 없었던’ 시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문재인의 마지막 영입인사”

“내가 겪은 아픔을 다른 사람이 겪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정치의 시작 아니겠습니까.”<2016. 2. 2. 서울신문>

공직에서 물러난 조응천은 부인과 함께 횟집을 운영하면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조응천을 정치 일선으로 불러낸 사람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였다.(이하 문재인으로 표기) 문재인은 조응천을 영입하기 위해 3개월 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결국 조응천은 문재인의 저 말을 듣고 입당을 결심했고, 문재인의 마지막 영입인사가 됐다.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조응천이 반대편인 야당에 입당하자 새누리당은 대번에 발끈했다.

“최악의 인재영입 케이스다.”

“선거를 앞두고 더민주의 초조함과 조급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상 2016. 2. 2. 서울신문>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국 청와대에서 정치적인, 불순한 의도로 일을 하면서 문건을 유출한 것임이 드러났다.”<2016. 2. 2. 서울신문>

아군의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에게 투항한 셈이므로 이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반면 많은 야권 지지자들은 조응천의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환영했다. 아울러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에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적의 치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조응천은 이렇게 말했다.

“더민주에서 나한테 그런 것 기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것을 얘기 했다면 단번에 ‘앞으로 오지 말라, 오셔도 집에 갈랍니다.’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런 낌새 보이면 ‘아니오(NO)’라고 할 것이고 그럼에도 계속 요구한다면 (당을) 나갈 거다.”<2016. 2. 4. 한국일보>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저는 더불어민주당이 강한 야당으로 거듭나고 수권정당으로 국민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미력이나마 돕기 위해서 온 것이지, 청와대나 여당에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닙니다.”<2016. 2. 3. JTBC>

앞서 시의는 손권에게 ‘신하는 직무를 행하면서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조응천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폭로’ 따위가 아니라 민주당이 ‘국민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데’ 힘을 다하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성격이 다른 정권에서 일을 했지만, 왜 이 사람이 모두에게 신임을 얻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자신이 아는 정보를 활용해서 여당을 압박하는 ‘술수’를 쓰지 않고, 자신이 지닌 능력과 경험을 ‘일’로 보여주는 ‘국민의 신하’가 되겠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보다 더 큰 폭로가 어디 있겠는가”

조응천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남양주(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 심장수 후보를 249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야당 강세 지역임에도 입당한지 두 달 남짓 된 새내기 정치인으로 인지도가 낮은 데다 선거운동을 한 시간도 한 달 남짓 밖에 되지 않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짐작한다.

“이쪽과 저쪽의 가운데가 아니라, 의로운 쪽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중도(中道)입니다. 저는 그 중도에 서서 야당을 혁신하고, 정치를 살리고, 대한민국을 살리는데 미력이라도 보태겠습니다. 온당(穩當)하지 않은 것을 본다면 과감히 맞설 것입니다. 그리고 자영업자로 살면서 겪은 서민들의 아픔에도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2016. 2. 2. 노컷뉴스. ‘더불어민주당 입당 선언문’ 중>

“당선 전이나 당선 후나 제가 드릴 말씀은 ‘국민만 바라보고 빡세게 하겠다’는 것뿐입니다.”<2016. 4. 20. 조응천 페이스북>

이제 조응천은 책상에서 벗어나 현장으로 뛰어든 현실 정치인이 됐다. 야당을 혁신하고, 대한민국 살리며, 서민의 아픔에 공감하고, ‘빡세게 하겠다’고 공언했으니 앞으로 조응천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겠다. 우선 정치인 조응천에 대한 평가는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걸어온 길과 2월부터 현재까지의 언행을 살펴보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거기에 조응천은 청바지를 입고 다니며, 국회의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횟집을 계속 운영하고 있다.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공직자의 기본 품성 중 하나인 ‘검소함’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시의처럼 오랜 시간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래도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조응천의 ‘함구 다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야권 지지자들은 현 정권의 실정과 치부를 폭로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한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2000년 ‘국민의정부’때도 청와대에서 근무했었다. 그때는 호남정권임에도 (저 같은) 영남사람이 가서 일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 정부에서 권력의 사유화 조짐에 맞서 싸우다가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됐고 결국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됐다. … 김대중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 MB정부 등 4개 정부에서 국정에 관여했었다. … 앞선 2개 정부에서는 정말 신명나게 일을 했었다. 그런데 이후 2 정권에서는 권력 사유화가 진행되고, 불투명한 과정이 있어도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2016. 3. 17. 머니투데이>

이보다 더 큰 ‘폭로’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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