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가도사건은 1621년(광해군 13) 후금[後金. 훗날 청(淸)]에 쫓긴 명(明)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한 이후 조선-명-후금 사이에 일어난 사건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모문룡의 군대가 가도에 주둔한 것은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해서 온 것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아무리 밤이 깊다 하더라도 비변사(備邊司-조선시대 군사 관련 비상사태를 담당했던 임시 기관. 훗날 가장 강력한 상설기관이 된다)를 소집하라’는 명을 내린 것[『광해군일기』 중초본 167, 1621년(광해군 13) 7월 25일 갑자 3번째 기사]을 비롯해 후금과 명에 사람을 보내서 두 나라의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후금 견제를 목적으로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허락했다. 모문룡의 입장에서도 후금을 견제하고, 조선과 후금이 연합하는 것을 견제하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가도에 주둔했다. 또한 지상전에 비하여 해전(海戰)에 약한 후금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문제는 모문룡과 인조반정 이후였다.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은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대부분인 가도 주민들을 모두 군대로 편입시켜서, 농사와 군사 훈련을 병행시켰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후금을 급습했다. 후금에게 모문룡의 존재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동시에 모문룡을 지원하는(지원 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후금의 입장에서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은 1627년(인조 5) 조선이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받게 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모문룡의 가도 주둔이 조선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모문룡이 군인 본연의 일만 했으면 좋았겠으나, 모문룡은 갖가지 이유로 지속적으로 조선 조정을 압박했다. 조선 조정은 사대(事大)에 입각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강요받았고,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이런저런 핑계로 군량 제공을 하지 않았으나, 인조가 등극하면서 모문룡에게 군량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량 제공은 1623년(인조 1)이 돼서 시작됐다. 즉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집권 이후 모문룡의 주둔 비용을 조선 조정이 부담한 것이다. 또한 조선 백성들이 후금을 지원했다는 핑계로 평안도에 상륙해서 조선 백성들을 구타하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의 군대인 모문룡과 그 군사들의 악행에 조선 조정과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어쩌면 할 생각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조와 조정이 조선의 백성을 모문룡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것만 문제가 아니다. 기울어져가는 명과 새롭게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그 사이에 낀 조선에서는 광해군 집권기까지는 신중한 중립 외교를 펼쳤으나,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인조는 성리학의 화이(華夷)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친명반청, 즉 명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고, 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외교를 펼쳤다. 이것도 모문룡의 가도 주둔과 함께 조선을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됐다.

결국 모문룡은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모한 전투를 일삼아 실패를 거듭했다는 이유로 명의 조정에서 파견된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처형당했다. 모문룡에 대한 평가와 그의 악행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광해군일기(중초본)』에 남아있다.

모문룡은 남쪽 지방의 사람이다. 요양성(遼陽城)이 함락될 때 탈출하여 여순(旅順) 어귀에서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나와 의주 주위에 기거하면서 견제의 계책을 하였다. 처음에는 세력이 고단하고 미약하였으나, 가도(椵島)로 들어가 웅거하면서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노적[奴賊-여기서 노적은 후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들이 동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 뒤, 그는 요동의 백성 2, 3십만 명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조정을 속여 해마다 황실의 은(銀) 20만 냥을 끌어내었다. 그러나 암암리에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무리들과 결탁하여 내당(內璫-황후나 후궁의 거처를 의미함. 필자주.)으로 들여보내고, 가도에 필요한 식량은 우리나라에 부담시켰다. 그들은 거짓으로 첩보를 올리고 심지어는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 전벌의 공적을 떠들어댔다. 외로운 섬에서 칩거하면서 위세부리는 것만 일삼았으나, 공상(功賞)은 더해져 벼슬이 후군 도독(後軍都督)에 이르렀다. 무진년(1629, 인조 7)에 이르러, 원숭환이 명을 받고 산해관을 나와 그 진상을 알고는 쌍도(雙島)로 불러내어 베어버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167권, 광해군 13년 7월 26일 기사.

이 기록에 따르면 모문룡은 조선은 물론이고, 명의 조정과 내시들에게까지 촉수를 뻗치고 뇌물을 바쳐서 그 지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이 인조반정 직후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즉, 광해군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조 집권기에도 모문룡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 것이다.

『광해군일기』가 한창 작성되던 시기 조선은 정묘호란이라는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병자호란이라는 더 큰 전란을 겪는다. 그리고 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 조정은 잘못된 외교 정책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2016년 현재 우리 정부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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