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은 자신의 근거지인 서울을 떠나 여당의 강세지역인 부산에 출마하여 당선되는 개가를 올렸다. 뚝심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 점에 착안하여 비록 강력한 군벌인 조조의 부하였으나 열세인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승리한 장수 장료(張遼, 169(?)-222)에 비유해 보았다.

● 장료(張遼)

조조의 부하가 되다

장료는 조조 수하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지』에선 여포의 부하로 독자들한테 첫 선을 보이는데, 실제론 장료의 첫 주군은 병주자사 정원이었다. 정원은 장료의 재능을 알아보고 부하로 삼았다. 이후에 수도로 와선 대장군 하진의 부하가 되었다. 하진은 장료를 하북 지역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도록 했다. 장료는 명령에 따라 천 명의 병사를 모아서 수도로 돌아갔는데, 그 사이에 하진은 십상시(十常侍)의 난리를 만나 죽어 버렸다. 하진이 죽자 동탁이 잠시 정권을 잡았는데, 장료는 천 명의 병사와 함께 동탁에게 투신했다. 이후 동탁이 여포의 손에 죽자 장료는 여포의 부하가 되었다.

여포는 정원의 수하로 있다가 동탁이 뇌물로 유혹을 하자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부하가 됐다. 나중에는 동탁까지 죽였으며,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준 유비를 쫓아내고 서주지역에서 독립했다. 장료가 왜 이런 사람의 밑에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건 여포는 장료를 신임했다고 한다.

198년, 조조는 유비와 연합해서 여포를 공격했다. 양군은 지루한 공방을 주고받았지만, 결국 싸움은 조조의 승리로 끝났다. 조조는 여포의 참모 진궁을 처형했고, 이어서 여포를 죽이려 했다. 여포는 조조한테 목숨을 구걸했다.

“조조 장군께서 대장이 되시고 제가 부장(副將)이 된다면 손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조조는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빙긋 웃으며 옆에 있던 유비한테 말한다.

“어쩌면 좋을까요?”

“조조 장군께서는 정원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죽인 것처럼 조조 당신한테도 배신을 할 거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유비도 냉정한 구석이 있다. 여포는 유비의 말을 듣자 길길이 날뛴다.

“썅! 이 귀 큰 놈의 새끼가 아주 믿지 못할 새끼로구나!”

이 때 조조 앞으로 끌려 들어오던 장료는 이 모양을 보고 속이 뒤집혔다. 여포한테 소리 질렀다.

“야! 이 자식아. 사내답게 죽어라. 무엇이 두렵냐!”

이 말을 들은 여포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못한다. 여포는 끌려 나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제 조조와 장료가 마주 했다. 조조가 말했다.

“이 사람이 장료인가? 처음 보는데?”

장료가 오만하게 대답한다.

“복양성 안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자네가 나를 몰라보는가?”

“아, 하하, 그렇구나. 거기서 만났었구나.”

“분하고 원통하구나!”

“뭐가?”

“그 때 나라의 역적인 너를 불살라 죽이지 못한 게 분하다!”

“뭣이? 싸움에 진 주제에 감히 나한테 욕을 해?”

조조는 칼을 들고 장료를 베어버리려 했다. 이 때 유비가 뛰어들어 조조의 팔을 잡고, 관우는 조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관우가 말했다.

“저는 장료가 의로운 선비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조조는 관우의 말을 듣고는 직접 장료의 결박을 풀어 주고 새 옷을 주어 입게 한 뒤에 상좌에 앉기를 권했다. 장료는 이들의 의기에 감동해서 세 사람에게 큰 절을 올린다. 이렇게 일류장수 장료는 진정한 주인을 만나게 됐다.

나는 장료다!

장료는 조조의 부하가 되면서부터 자신이 가진 기량을 맘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년, 조조와 원소의 운명을 가른 ‘관도대전’이 벌어졌다. 장료는 이 때 원소군의 식량창고가 있던 오소라는 곳을 습격해서 큰 공을 세웠다. 원소군은 여기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고 사실 상 싸움에서 패배하게 됐다. 이후 원소의 아들 원담과 원상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외에도 장료는 크고 작은 싸움에 참전하여 자신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장료의 진가가 발휘된 싸움은 215년에 벌어진 ‘합비전투’다. 이 때 조조는 서쪽의 한중지역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을 나가 있었다. 장료를 비롯한 조조의 장수 이전, 악진 등은 합비를 지키며 손권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손권은 조조의 주력이 원정을 나간 틈을 타서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공격해 들어왔다. 첫 싸움에서 손권 군은 합비와 인접한 지역인 완성을 점령했다. 장료는 이곳을 탈환하지 못하고, 합비를 지키는 한편, 조조한테 사람을 보내 전황을 보고 했다. 얼마 후에 조조한테서 궤짝 한 개가 도착했다. 궤짝의 겉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적이 오면 뜯어보아라.’

손권의 십만 대군이 고작 칠천 명의 병력이 지키고 있는 합비로 밀려 들었다. 장료는 궤짝을 뜯었다. 그 안에는 조조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만약 손권이 직접 왔다면 장료 장군, 이전 장군이 나가 싸우고, 악진 장군은 성을 지키며, 설제는 싸움에 가담하지 마라.”

아니 이게 뭔가. 십만 대군이 왔는데 나가서 싸우라니. 장료가 말했다.

“승상(조조를 가리킴)께선 우리 주력이 원정을 갔으니 우리가 구원병을 기다리고 있으면 저들이 우리를 격파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먼저 기습을 해서 저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합비성을 지키라고 하신 겁니다.”

이전은 장료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묵묵히 말을 하지 않고, 악진은 둘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한 마디 한다.

“적병의 수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싸우기 어렵지 않을까요? 지키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마는…….”

이 말을 들은 장료는 소리를 버럭 지른다.

“성패는 이 싸움 한 번에 달려 있습니다! 두 분은 승상의 말씀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이어서 장료는 병졸한테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내 갑옷, 투구와 말을 준비하라!”

이 모양을 본 이전은 의기가 발동했다. 칼을 집어 들고 일어선다.

“장군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제가 어찌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공적인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장군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장료는 칠천의 군사 중에 용맹한 병사 800명을 선발한 다음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는 다음날 있을 큰 싸움에 대비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손권의 선봉부대와 악진의 부대가 먼저 만났다. 악진은 일부러 지는 척하면서 후퇴를 했고, 손권의 선봉부대는 이것도 모르고 깊숙이 따라 들어온다. 손권은 선봉부대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세등등하게 돌진해 들어간다. 이 때였다. 좌우에서 장료와 이전의 정예병이 손권의 본진을 향해 뛰어 들었다.

장료는 적진을 헤집고 다니면서 적병 수십 명을 베고, 장수 두 명을 베어 버렸다. 장료의 목표는 저기 보이는 손권의 깃발이다. 그 곳에 손권이 있다. 장료는 적의 포위 속을 뚫고 다니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장료다!”

뜻밖의 기습을 당한 손권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급히 군대를 물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료의 병력은 소수였다. 오래 싸울 수 없었다. 수많은 적병을 베고 후퇴하여 성을 굳게 지키기 시작했다. 이후 조조의 대군이 합비성으로 도착했고, 손권은 합비를 손에 넣지 못하고 퇴각했다. 장료는 이렇게 손권을 물리치고 합비를 지켜냈다.

과감성과 침착함을 겸비한 장수

이보다 앞서 장료는 손권의 선봉부대와 싸워 이겼다. 손권의 일류장수 태사자는 보복을 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자신의 부하 중에 장료군의 말 먹이는 사람과 형제인 사람이 있는데, 둘을 이용해 성에 불을 지르게 하고, 성이 혼란스러워 지면 이를 틈타 성을 함락할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장료는 첫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와 병사들에게 술과 밥을 배불리 먹인 다음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이겼다고 하지만 적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특별히 오늘은 갑옷을 벗지 말고 대기하도록 해라.”

모든 장수들은 장료의 명령을 듣고 의문을 품는다.

“우리는 오늘 이겼고, 저들은 멀리 후퇴했는데 왜 편히 쉬게 하지 않고, 군사들까지 갑옷을 벗지 말라 하시는 겁니까?”

“장수는 이겼다고 기뻐해서도 안 되고, 졌다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응전태세를 갖춰야 하는 법이다. 이것이 대장의 도리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손권 군이 공격해 온다면 어떡할 건가? 그러므로 승리를 거둔 오늘 밤을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됐다. 장료의 말 먹이는 사람이 성에 불을 질렀다. 모두들 당황했지만 장료는 태연했다.

“반드시 몇 사람이 장난을 해서 군심을 어지럽히려고 선동을 하는 것이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망동하는 병사는 목을 베겠다!”

장료는 병사를 출동시켜 두 사람을 잡은 다음, 문초를 해서 태사자의 계략까지 알아내고는 죽여 버렸다. 태사자는 이런 줄도 모르고 성으로 들어왔다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결국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살펴보았듯 장료는 의기가 충만하고, 용맹성이 있는데다가 침착성까지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료가 조조 진영을 대표하는 장수, 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중 일류로 평가되는 까닭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라고 하겠다.

장료는 이후 조비를 따라 손권의 오나라 공격에 참가했다가 오나라 장수 정봉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정사 삼국지』에는 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전사했지만, 장료는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싸워 이겼고, 참전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다. 한편, 여러 명의 주인을 섬겼던 사실을 흠으로 잡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허울뿐이었다고 할지라도 군벌들은 한나라 황실의 신하였으므로, 정작 장료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사실을 두고 장료를 폄하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의원

다시 민주진영으로

김영춘(金榮春, 1962 - )은 1988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시절 총재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야당의 길을 걸어오던 김영삼이 김종필, 노태우와 ‘야합’을 할 때는 잠시 정계를 떠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김영춘은 1993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 정무비서관이 되었다. 옛날 말로 치면 김영춘의 첫 주군은 ‘김영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서울 광진(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낙선했고, 2000년, 제16대 총선에선 한나라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원래 김영춘은 정계에 발을 들이기 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으나, 어찌되었건 현재 김영삼의 민주화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하더라도, 동탁 같고 여포 같은 무리가 모여 있는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소속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한나라당은) 도로 민정당입니다. 제가 총재님을 따라서 김영삼 개혁정권을 만들어 왔던 것이 도로 민정당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김영삼 정권 말기부터 이 민정계들이 이회창 후보 탄생하는 과정에서 김영삼 이념 두드려 패고, 그렇게 당신을 해친 정당인데, 뭘 그렇게 미련을 갖습니까?”

장료가 여포를 꾸짖으며 조조의 장수가 된 것처럼 김영춘은 자신의 주군인 김영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인 2003년에 탈당을 해 버렸다. 그러고는 열린우리당 창당에 힘을 보탰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서 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이 도로 민정당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옛날 그 야당의 뿌리, 개혁적인 정치를 위해서 이 나라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깨보고 싶은 겁니다. 이 판을 깨야겠습니다.”<이상 2012. 4. 3. 딴지일보>

이렇게 김영춘은 다시 민주진영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김영춘은 같은 지역구에서 한나라당 당적을 버리고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17대 총선에 출마했다.

“제가 정치적으로 죽더라도 목을 내 걸고 이 나라의 이 썩은 정치, 이 거짓말 하는 정치, 나라와 국민을 앞세우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재선, 삼선이나 자신이 속한 당의 이익만을 먼저 앞세우는 그런 정치와 싸워야 되겠다. 그 정치를 우선 깨버리고 새롭게 만들어가야 되겠다. 그런 생각으로 그 길을 향해서 우리 모두 마음과 마음을 열고 팔과 팔을 엮고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갑시다.”<2003. 11. 29. “열린우리당 광진(갑) 지구당 창당대회”, YouTube>

당시 열린우리당의 기세가 강했다고 하더라도 이렇듯 당적을 바꾸고 출마하여 승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어찌되었건 김영춘의 진심이 통했는지, 아니면 김영춘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서울 광진(갑) 유권자들은 김영춘을 철새라고 부르지 않고 품어주었다. 이후 김영춘은 제18대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 실패의 책임을 통감하고 출마하지 않았다.

“야! 이 자식아. 사내답게 죽어라. 무엇이 두렵냐!”

장료의 일갈이 귓전에 맴도는 것 같다. 장료 같은 결기를 지닌 김영춘은 스스로 책임을 졌다.

부산 부활의 선봉장이 되다

이후 김영춘은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하여 창조한국당에 입당했다. 김영춘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의 총괄선대본부장 직을 수행했다. 김영춘 나름대로 소신에 따라 행동했겠지만, 어찌되었건 옛날 말로 치면 주군을 또 바꾼 셈이다. 문국현은 5.7%의 초라한 득표율을 보이면서 낙선했고, 김영춘도 함께 좌절을 맛보았다.

2010년, 손학규가 민주당의 당대표가 되면서 김영춘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영춘은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소속으로 고향인 부산에 출마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김영춘은 왜 자신을 두 번이나 당선시켜준 서울 광진(갑) 지역구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던가.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서?

“(전략) 결국 삼당합당 문제로 돌아가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부산이 20년 동안 한나라당한테 구속돼있는 셈 아닙니까? (…) 부산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 부산 경남의 완전한 한나라당화, 한나라당 일당독점 지배 상태가 된 겁니다. 제가 김영삼 총재 비서를 했기 때문에, 나중에 삼당합당을 하고 난 뒤에 김영삼 정권의 탄생에 제가 일조를 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제가 결자해지, 제가 YS는 아니지만 그 부하였던 사람으로서, 총애를 받았던 사람으로서 김영삼 총재는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저는 내가 결자해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2012. 4. 3. 딴지일보>

장료가 적진에서 ‘나는 장료다’를 외쳤던 것처럼 김영춘은 적진이 되어 버린 부산에서 ‘내가 결자해지를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부산진(갑) 유권자들은 김영춘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영춘은 멈추지 않았다. 2014년, 제6대 지방선거에선 부산시장에 도전했으나 무소속의 오거돈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진(갑) 지역구에 출마했다.

“부산은 야당보다는 여당지지 규모가 세 배 이상은 되는 것 같다. 60%의 벽을 쳐다보는 막막함이 컸다. 처음엔 힘이 들었다. 일부 야당 지지자 사이에서는 YS와 한나라당 출신이었다는 것과 열린우리당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 비판도 서슴지 않아 이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 하지만 요즘은 거의 없어졌다. 여당 지지층에게는 우리 동네 사람이구나라는 확인을 하고 있다.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점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 그러나 여전히 지역의 벽은 공고하다. (…) 부산은 어떤 바람이 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벽이 형성되어 있다. 나는 그것을 깨려 하고 있다.”<2016. 3. 14. 민중의 소리>

그러나 역시 부산은 적진이었다. 20대 총선이 치러지기 전 여론조사에서 새누리당의 나성린은 57.3%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김영춘은 고작 25.7% 밖에 얻지 못했다.<2016. 3. 23. 부산일보> 장료와 같은 김영춘은 손권의 대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30% 이상의 격차, 제 아무리 조사는 조사일 뿐이라지만, 이 엄청난 격차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총선 투표일까지 ‘3일 벌떼작전’으로 부산야당의 전멸을 막아달라. (…)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12일 선거구내 주요 지점에서 ‘벌떼작전’ 참여를 호소하는 켐페인을 벌여 나가겠다. (…) 동네 거리여론이 우세하나, 속을 드러내지 않는 새누리당 고정표가 많을 것이다. 새누리당 조직의 총가동이 예상되니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2016. 4. 11. 뉴스1>

큰 싸움을 앞두고 상대의 조직이 움직이기 전에 아군의 정예병을 추려서 기습을 가한 후에 적군의 예기를 꺾는 작전으로 이해한다. 이 작전이 주효한 것일까. 김영춘은 4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새누리당의 나성린을 3% 차이로 따돌리고 극적으로 당선됐다.

“저의 당선은 시민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새누리당 일당 독점 20년을 끝내고 견제와 균형의 부산정치를 새로 시작하라는 시민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우리 부산의 보통서민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서민들이, 우리의 열심히 일하는 서민들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부산진구 주민들이 어디 가서도 우리 지역 국회의원은 김영춘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국회의원이 되겠습니다.”<2016. 4. 14. 부산일보. 기사내용일부 수정>

장료가 800명의 병사로 손권의 진영을 헤집어 놓은 것처럼 김영춘은 적진으로 뛰어 들어 귀중한 승리를 얻어냈다. 김영춘은 더불어민주당의 부산광역시당 위원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영춘은 ‘부산 부활의 선봉장’이 되었다. 김영춘 외에 전재수, 최인호, 박재호, 김해영 등도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부산에서 당선되었다.

대권도전이 ‘결자해지’는 아니다.

“(대권에) 전혀 생각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죠. 조급하게 해서 뭐가 되겠냐는 생각이 있습니다.…부산 출신 대통령은 부산 발전에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죠. 대통령을 서둘러 하겠다는 생각은 없고 정치 개혁을 위해, 이 나라가 선진 일류 국가로 가는 길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면 국민적 지지가 쌓일 거고 그 힘으로 대선에 도전한다는 목적을 세워야 합니다.” <2016. 4. 25. 오마이뉴스>

김영춘은 적지에서 대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스스로 밝힌 것처럼 ‘결자해지’를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앞으로 정말 부산이 예전처럼 민주진영의 근거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 줄 것으로 믿는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대권’에 조급하게 다가서는 것보다는 부산을 부활시키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대권을 꿈꾼다. 그러나 단 한 명한테만 허락되는 그 자리는 꿈꾸는 것만으로 얻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정치인 김영춘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김영춘은 어떤 계파에 속해 본적이 없고, 특정인을 주군으로 삼은 적도 없다고 말한다. 김영삼은 논외로 하더라도 문국현이든 자신을 불러들인 손학규든 이들을 김영춘의 주군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김영춘은 이미 그들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열린우리당에서 창조한국당으로, 창조한국당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꾼 ‘행위 자체’는 김영춘의 소신이 어떠하든 간에 야권 지지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에 부족한 점이라고 본다. 부산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고 해서 이를 등에 업고 대권 도전에 나서기보다 우선 부산의 민심을 다지고,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 지지자에게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어야 하겠다.

“정치인은 당연히 만들고 싶은 나라의 비전이 있다. 제가 책임지고 실행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경영하고 싶은 거다. 그런 꿈이야, 당연히 저한테도 있다. (목소리를 높이며) 제 자부심인지 자만심인지 몰라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것 같다. 하하, 경험이나 훈련도 많이 됐다. 하지만 정치를 시작하면서 ‘무엇이 되기 위한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재비서로 정치에 입문해서 30년 동안 이 생활을 해왔다.” <2016. 5. 2. 일요신문>

진정으로 자신이 ‘삼당합당’으로 인한 ‘부산의 한나라당화’를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거기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말을 꺼냈으면 우선 자신이 한 말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다른 사람보다 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으로 옮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김영춘의 발언을 살펴보면 ‘내가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데 이런 생각과 태도가 김영삼의 ‘삼당합당’에 일정 가량 기여했다는 생각을 하면, 김영춘의 의지를 반드시 높이 사긴 어렵다고 본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삼국지인물전> 외 5권
▸팟캐스트 <삼국지인물전> 진행자

자신의 수많은 경험과 훈련은 알고 보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치를 하면서 겪은 실패와도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실험을 통한 실패를 눈감아 주고 또 한 번 지지해 준 유권자한테 자신감 또는 자부심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30년 간 경험을 쌓았다지만, 김영춘은 여러 주군을 거쳐 조조진영에 자리를 잡고 나서야 재능을 꽃피운 장료처럼 이제 시작하는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갑옷을 벗을 때가 아니다. 갑옷을 벗는 순간, 노장 정봉의 화살이 날아들 것으로 짐작한다. 그 ‘정봉의 화살’은 누가 쏘는 것이 아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정봉의 화살’인 것이다. 아직 김영춘은 야권의 필승카드가 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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