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미선 칼럼니스트
·스토글 대표이사
·경찰교육원 외래교수 / 교보문고 독서코칭 전문강사 / 아동문학가

【투데이신문 윤미선 칼럼니스트】악한 일은 악한 계획 속에서 나오지만, 사실 그런 악한 계획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에서 나온다. ‘생각 없음’ 즉 ‘무사유’ 이 말은 유대인 학살에 큰 책임이 있는 나치스의 한 관료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다.

아이히만은 나치스의 한 관료로서 히틀러와 힘러의 지시를 받아, 유대인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학살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낸 사람이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유대인들을 각자가 살던 집에서 나와 게토로 옮기게 하고, 또 이들을 게토에서 집단 수용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죽음의 수용소로 옮겨 죽게 만들었던 사람이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참관하고 600만명이라는 생명을 죽인 주범인 아이히만의 평범함에 놀라고, 또 그가 자행한 악행들이 그 평범함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고, 이 말은 아이히만뿐 아니라 모든 현대인들이 바쁘게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는데서 큰 악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더욱 치명적일 수도 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말처럼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안고 갈 수 있다.

최근 K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이제부터 말을 안하고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며 하소연을 했다.
부부싸움을 하던 도중 홧김에 아내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다시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게 흘러가 결국 K씨는 집을 나와 원룸에서 생활하게 됐다.

“아내가 얼마나 상처를 입을까? 하는 생각은 나지도 않았어요. 그냥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최대한 잔인한 말로 내 화를 풀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다음날 싸늘해진 아내가 더 이상 저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더라구요. 당분간 아내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피해 주는 게 낫겠다싶어서…….”

필자가 그렇게 아내 분께 잘 못했다는 걸 알았으면 진심으로 사과를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절대로 사과를 받아줄 리 없다고 했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언쟁이 일어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피하는 게 옳은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과는 다르지만 K씨와 같은 상황을 겪은 부부들이 많을 것이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비수로 날아와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 가족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는 K씨에게 지금 당장 아내 분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함께 대화를 하라는 조언을 해 줬다. K씨에게는 당연한 조언이었지만 아내에게 다가가는 힘이 된 듯하였다.

평상시 가족에게 쓰는 언어를 보면 그 가족의 건강척도를 엿볼 수 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 했네요”
“함께 노력해 봐요”
“잘하고 있어요.”
“우리 가정이 행복한 것은 당신의 힘이에요”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우리가정의 행복을 서로 만들어가려는 생각을 갖는다면 가정의 언어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최근 서울대와 고려대 등 이른바 명문대에서 남학생들이 모바일 단체 채팅방을 통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로 여학생들을 성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었다. 여성들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등 자신들의 가십거리로 삼았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문제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는 점이다.

성을 장난이나 놀이처럼 희화화 대상으로 여기는 무사고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도 못하는 것은 수 백 만 명을 죽음으로 내 몰고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서로 간 소통의 과정 속에서 존중과 배려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야말로 건강한 가치관과 올바른 의식을 갖게 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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