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조정래의 소설 『한강』을 읽었던 것은 15년 전 전남 장성에 있는 상무대에서였다. 당시 나는 소위로 임관한 후 포병학교에서 5개월간의 병과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는 틀에 박힌 생활이 무척이나 답답하고 지겨웠기에 야전으로 나갈 날만을 매일같이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포병학교에서의 생활은 군에서는 물론이요 내 인생에서도 그때처럼 안정적인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선뜻 집어들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기억의 보정만은 아닐 것이다. 옆방의 동기는 당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최인호의 『상도』를 비롯해 여러 장편소설들을 섭렵하기도 했다.

그때 『한강』을 읽었던 기억이 내게 오래도록 남아있는 것은 소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때문이다.

“예로부터 은혜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쉬 잊고 은혜를 입힌 사람은 잊지 않아 인간사에 온갖 탈이 생긴다.”

일과시간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에 침대 옆 책상에 앉아 맞이했던 이 구절은, 당시 군대 안에서 한없이 자기중심적인 어린아이가 되어가던 내 마음에 작은 브레이크가 되어주었다.

야전에 있던 시절 나의 보직은 교육장교였는데, 가끔씩 자대에 갓 전입해 온 신병들을 반나절 동안 데리고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영내 도서관에 신병들을 모아놓고, 큰돈은 아니었지만 자비를 털어 PX에서 빵과 음료수를 넉넉하게 사다놓은 뒤 되도록 자리를 피해 있곤 했다. 잠시나마 동기들끼리 편히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가만히 앉혀둘 수는 없으니 중간에 한 번씩 도서관에 가서 나름 신병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말을 해주었다. 그 중 하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운해 하지 말자.

군대에 가면 세상의 모든 억압과 공포와 폭력과 비참함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된다고 느껴진다. 입에 단내가 나는 훈련, 행군, 부조리, 얼차려 같은 것이 활자로 찍혀 입으로 읊어질 때는 마치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내가 그 대상체가 되었을 때는 실존하는 현실이자 누구도 대체해주지 못하는 고통이 된다. 그래서 사회인일 때와는 달리 극단적으로 시야가 좁아진다.

그렇지만 군대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하게만 사는 것도 아니다. 당장 시계를 몇 개월 전으로만 돌려보면, 그때도 너희의 고참들은 바로 이곳 군대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때의 너희들 역시도 사회에서 녹록치 않은 삶을 살고 있었을 거다, 그러니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너희가 기대하는 만큼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식으로 말을 꺼내곤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 속에 놓여있던 신병들에게 과연 적절한 조언이었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그때 내가 도서관에서 주제넘게 던졌던 말은 어쩌면 오히려 내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언젠가 병원에 8개월 간 장기입원을 했던 적이 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병문안을 와주었다. 동시에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나 역시도 사람이기에 병상에 누워 연락 없는 지인들이 떠오를 때면 서운한 마음이 절로 날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조정래의 소설 한 구절과 신병들 앞에서 교육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힘든 만큼 병원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도 각자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그동안 주변의 아팠던 벗들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면서 살았던가. 그동안 내가 받았던 주변의 은혜들을 얼마나 쉬 잊어버렸던가. 나는 지금 내가 예전에 베풀었던 하찮은 호의에만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반성들을 하다 보면 약 기운 때문에 멍해져 있던 머리가 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말복이다. 실내온도는 어제와 같지만 체감온도는 사뭇 다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머리가 좀 맑게 돌아가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병원에서 장기간의 입원치료를 무사히 마치고 세상에 다시 돌아왔을 때도 이런 견딜 수 있을 만한 햇살이 쏟아지는 여름날이었다. 그때 차창 밖으로 푸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고마움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고, 서운함을 붙잡지 않는 사람이 되자고. 오늘도 다시 한 번 같은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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