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대다수의 사람들은 5년 전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심지어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 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유가족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이유가 ‘가습기살균제’라는 사실이 밝혀지던 5년 전 그 날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구매한 살균제가 살인마로 변해 가족의 생명을 앗아갔다. 지난 시간 피해자들은 슬픔과 분노에 쌓여 정부, 그리고 기업과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7월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이하 가습기특위)가 구성되며 국가차원의 국정조사와 함께 본격적인 검찰수사가 시작됐다.

국정조사가 합의되며 특위가 구성된 며칠 후, 가습기살균제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 유가족 한 명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기자를 향해 눈물지으며 말했다. “뼈아픈 기억을 수시로 들춰내며 지난 시간 싸워왔는데 드디어 빛을 보나 싶네요. 억울하게 떠난 남편의 한을 풀어준다는 국가를 한 번 더 믿어보겠습니다.”

이렇게 가습기살균제 국정조사가 시작된 지 어느 덧 한 달하고도 보름이 더 지났다. 그동안 특위는 옥시와 SK케미칼 등 제조·판매사들과 환경부, 고용노동부 등 책임부처들에 관해서도 직접 현장 조사를 펼쳤다.

진상규명과 함께 피해자들을 구제하겠다던 특위는 현재 모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안타깝게도 국정조사 기간 피해자들과 함께 현장을 누볐던 기자의 대답은 ‘노(NO)’다.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이라는 점, 현 정부가 매우 소극적이라는 점 등을 감안한다고 해도 지금 특위의 모습은 굉장히 무기력하다.

현장조사는 첫날부터 삐거덕댔다. 조사의 공개여부를 두고 여야가 1시간가량 설왕설래했고 끝까지 비공개 조사를 고집하던 새누리당에 못 이겨 결국 현장조사 대부분이 비공개로 결정됐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 있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의 현장조사에서 아타 사프달 대표는 살균제 유해성에 대한 연구조작 의혹에 대해 “은폐 의혹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어떤 근거도 내놓지 않았다.

정부부처의 현장조사에서도 별반 다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늑장대응에 관한 지적에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 반성의 기미조차 찾을 수 없었다. “물질 유해성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건 환경부 소관”이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산자부의 모습은 5년 전과 소름끼칠 정도로 일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위의 현장조사는 별다른 추가 일정 없이 끝나버렸다.

못내 찜찜한 특위의 현장조사가 마무리되고 피해자들은 영국 현지조사에 기대했다. 영국을 방문해 레킷벤키저 영국 본사의 CEO를 만나 감춰진 진실을 규명하고 영국 정치 인사들과의 면담을 가지겠다던 특위의 약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19일 영국 현지조사에 대한 일정이 전면 무산됐다. 한국의 국정조사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옥시 본사의 입장에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위의 계획에 따라 현지조사를 준비하던 피해자 유가족들은 또다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와야 했다.

그동안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가족을 잃은 고통의 기억을 억지로 꺼내며 사건의 진상규명을 외쳐왔다. 그들이 발 벗고 뛰며 이뤄낸 국정조사의 기간이 현재 반절 넘게 지났지만 일부 가해기업의 추가 혐의만 확인됐을 뿐, 베일 속에 감춰진 사건의 본질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피해 신고는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 몇 명의 피해자가 더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는 29일부터 진행되는 가습기살균제 사건 청문회가 끝나고 나면 곧 특위의 국정조사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보였던 실망스러운 모습을 만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억울하게 떠난 남편의 한을 풀어준다는 국가를 한 번 더 믿어보겠다”라고 말하던 유가족의 믿음에 특위는 부응할 수 있을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명백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겠다던 가습기 특위가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더 이상 광화문과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서 이들이 피켓을 들고 눈물짓는 모습을 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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