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작년 이맘때 칼럼에서 필자는 본 지면을 통해 「누구를 위하여 축문(祝文)은 읊히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한 적이 있다. 해당 칼럼을 통해 필자는 무리한 차례는 결국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이 섭섭함을 풀기 위한 것이며, 이것은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하고 싶었다. 즉 성하지 않은 몸상태나 차례상을 차릴 수 없는 경제 상황인데 무리하게 차례상을 차리는 것은 순전히 산 사람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상들이 과연 달갑게 받을는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명절증후군을 비롯한 가족 내의 갈등을 유발하고, 차례의 본래의 목적인 ‘가족끼리의 동질감 확인’보다는 가족끼리의 갈등과 상처만 남길 수 있다. 올해 추석에는 과연 이러한 주장이 널리 퍼져있을지 모르겠으나, 작년 칼럼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황교익씨의 칼럼이 다시 언급되고, 역시 칼럼에서 언급했던 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이 또다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차례에서 드러나는 과시욕과 ‘후손의 이기심’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작년에 필자가 작성한 칼럼을 읽다가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칼럼에서 필자는 “공식적으로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특히 제주(祭主)가 몸이 좋지 않을 경우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명백한 실수임을 고백한다. 차례나 제사가 ‘공식적인 규칙’이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표준’은 있을 수 있지만,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만한 규칙이 있지는 않다는 의미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던가?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내용을 좀 더 확인해보았다. 일단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았는데, 역시 많은 질문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아픈 사람 있으면 차례 지내나’를 검색어로 검색해보았더니 5천 건이 넘는 질문이 나타났다. 이 문제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의미이다.

차례나 제사에 공식적인 규칙이 없지만, 과거에는 분명히 규칙이 있었다. 바로 성리학의 국가의 사상적 배경인 조선시대였다.(물론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도 준칙이 있었다. 둘 다 전체주의와 독재를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고종실록』 고종 3년(1866) 12월 7일 기록에 따르면 검토관 신헌구가 ‘우리나라는 나라에서는 《오례의(五禮儀)》를 사용하고 일반 가정에서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라고 고종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사례편람》이 우리 전통 차례 방식을 담고 있는 가장 최근 문헌일 가능성이 높다. 《사례편람》은 조선 후기의 학자·정치가 이재(李縡)가 편술한 관혼상제의 사례(四禮)에 관한 종합적인 참고서로, 이재는 《사례편람》 작성을 위해 많은 의례 관련 서적을 인용했다고 전해진다.

《사례편람》에는 집안에 환자가 있거나 우환이 있으면 차례나 제사를 치르지 말라는 공식적인 얘기는 없다. 다만 제사와 관련해서 ‘무릇 제사는 지극한 애경지심이 중요하며, 집안이 가난하면 이면 형편을 헤아려 할 것이고, 병이 있으면 제사를 치를 근력이 있는지 살펴 행하고, 재력이 충분하면 마땅히 의절에 따를 것이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결국에는 재정적 상황과 신체적 상황을 고려해서 차례나 제사를 지내라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사례편람》에서 규칙을 이렇게 애매하게 언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환자 없는 집이 없을 것이고, 작은 우환도 우환이라면 우환이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우환이 있으면 제사나 차례를 지내지 말라.’고 하면, 별것 아닌 우환이 자칫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않을 핑계”가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전통에서 차례나 제사를 지낼지의 여부는 산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사례편람》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서 ‘산 사람이 아닌 돌아가신 조상을 중심으로 생각하라.’고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산 사람의 아집과 판단 미스로 인해 조상에게 누를 범하게 되면, 결국 “효를 핑계로 자신의 섭섭함을 풀려다가 불효를 저지르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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