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신성교회 이남철 장로, 소년에서 노인이 되기까지 소록도에서 보낸 50년 세월을 말하다

   
▲ 이남철 장로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12살, 한센병 발병...이질적인 시선 견디지 못해
17살, 소록도 입성...인권탄압 이루 말할 수 없어

단종·낙태 수술, 소록도 100년 역사의 가장 큰 오점
강제성 인정 않는 정부, 훔치고 잡아떼는 도둑과 같아

신앙생활로 절망과 좌절 모두 극복해
과거 원망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것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 전라남도 함평 어느 작은 마을에 한센병을 앓는 12살짜리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치료는 고사하고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남들 눈을 피해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7살이 되던 해,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쫓겨나다시피 녹동 바다를 따라 소록도로 들어왔다. 반드시 완치돼 당당히 고향땅을 밟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소록도로 향했던 소년은 어느덧 흰머리가 무성해진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됐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소록도 신성교회 이남철(67) 장로다. 이 장로는 소록도 100년 역사의 절반을 함께했다. 그 역시 강제 노역, 단종 수술 등 정부와 사회로부터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 살아온 수많은 한센인 가운데 한명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마음가짐 하나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한센인들을 위해 세상 밖으로 목소리를 내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소록도에 대한 편견을 뽑는데도 앞장섰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 많은 한센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소록도를 떠나는 와중에도 굳건히 섬을 지켰다. 자연스럽게 그에게는 ‘소록도 지킴이’라는 이름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 장로 역시 세월 앞에 장사 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나이가 많아 예전만큼 체력이 따라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건강이 악화돼 많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시력이 안 좋아져 운영자로 있는 인터넷 카페 ‘소록도지킴이’을 유지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과거의 아픔으로 누구보다 소록도가 끔찍이도 싫을 수 있을 이 장로. 하지만 그는 어느 지상낙원보다도 소록도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투데이신문>은 이남철 장로를 만나 소록도에서 보낸 지난 50년 세월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 이남철 장로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사람들의 편견, 소록도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

Q. 소록도에는 어떻게 처음 들어오게 됐는지.

당연히 한센병에 걸리면서다. 고향은 전라남도 함평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센병이 발병했다. 다른 사람들의 이질적인 시선 때문에 비로소 병에 대해 깨닫게 됐다. 당시에는 치료할 수 있는 마땅한 약도 없었고 소록도로 모를 때라 병에 걸리고 2~3년간은 소위 말해 골방생활을 했었다. 병에 걸린 이후 나한테 쏠리는 이목들이 부담스럽고 싫었다. 그래서 갇혀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거의 쫓겨나다시피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Q. 당시 소록도 환경은 어땠는가.

17살이 되던 해인 1966년에 이곳에 오게 됐는데 그때 나와 같은 한센인이 약 4500명 정도 있었다. 우리를 관리하는 직원들이 많기는 했지만 의사, 간호사처럼 의료분야에서 일하는 인력은 너무 많이 부족했다. 내 기억 속에는 의사가 2명, 간호사가 5명뿐이었다. 10명도 안 되는 사람들이 4500명을 제대로 치료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좋은 약, 제대로 된 약 한번 써보기 힘들고 먹는 게 부실해 영양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소록도에 올 적에는 치료받아서 깨끗하게 완치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일 텐데 오히려 병이 악화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다들 지금까지 소록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Q. 외부와 차단된 생활을 했다. 그 당시 경제활동은 어떻게 했는지.

경제활동이라 할 게 없었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수용소와 같았다. 그래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식적으로 외출을 보내주면 안 돌아오는 사람이 100%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곳에 있어봐야 병원 상황이 열악해 병을 고치기는커녕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는 마땅한 일거리도 없으니 돌아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Q. 한센인으로 살면서 가장 서러웠던 점은.

한센인이 지은 죄라면 한센병에 걸린 그 죄 하나다. 하지만 이것이 죄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런데 병원에서는 강제 노동을 시키며 구타를 일삼았다. 병원 밖 상황도 다를 바 없었다. 돌아다니면 돌팔매질 맞아 터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식당에 가면 생김새를 보고 밥이 없다고 안 팔고 이발소에 가도 피하기 일쑤였다. 언젠가 버스를 탔는데 사정없이 욕을 하며 차 맨 뒤쪽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나마 태워주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그것마저 거절당하면 기차역까지 5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기차를 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객실에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여름이고 겨울이고 지붕에 올라타서 가야 했다.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우물에 물을 뜨러 갔던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빈 양동이를 들고 되돌아왔다. 나중에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엿들어 보니 내가 전염병 환자이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식수마저 못 뜨게 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것이 소록도에 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Q. 한센인을 대상으로 단종·낙태 수술도 강제로 시행됐다던데.

단종·낙태 수술이 소록도 한센인 100년 역사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을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단종·낙태 수술은 일제 치하에서 시작해 해방 이후 우리 정부에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나 역시 단종 수술의 피해자다. 처음에 현행범이 아닌 도둑을 잡으면 딱 잡아뗀다. 단종·낙태 수술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가 딱 이런 식이다. 정신 나가지 않고서야 어떤 사람이 스스로 나서서 단종·낙태 수술을 받았겠는가. 성경에도 나와있지만 이 같은 인권침해는 최고로 나쁜 죄악이다.

Q. 올해 5월 일본이 국내 한센인 피해자 590명에 대한 일괄손해배상 절차를 마무리했다. 자국인 한국은 어떤 배상을 해줬는지.

일본이 해준 배상은 단종·낙태 수술이 아닌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는 강제 수용에 대한 부분이다. 해당 정책은 처음 일본에서 일본 한센인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한센인들도 똑같이 피해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변호사에 의해 추진돼 지금의 결과가 있게 됐다. 우리나라는 2007년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이하 한센인사건법)을 제정해 2008년도부터 시행됐다. 한 달에 생활비 명목으로 15만원씩 지원해 주는데 그것 가지고 배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받고 있다.

   
▲ 이남철 장로 ⓒ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

“지나간 일 모두 흘려보내고 긍정적으로 살고싶어”

Q. 요즘은 주로 무얼 하며 지내는가.

교회의 장로로 있기 때문에 그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10년 전쯤에는 자치회 일도 많이 했다. 생로병사라고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다 보니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그래서 자치회 일은 그만두고 그동안 못했던 취미생활을 하며 휴식 중에 있다.

Q. 소록도 사람들의 신앙심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앙 생활을 통해 얻은 바가 있다면.

소록도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낙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마 신앙이 아니었다면 녹동 바다에는 시체가 둥둥 떠다녔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신앙 활동을 통해 그런 부정적인 마음과 생각들이 건강에 해를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절과 절망을 모두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살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Q. 정착촌을 비롯해 소록도 밖에서 살고 있는 한센인 많아졌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어떻다고 하던가.

1974년경 정부가 나이가 젊고 활동력 있는 사람들 가운데 희망자를 대상으로 소록도 밖에 마련한 정착 마을에 나가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한 바 있다. 그때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에서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며 건강도 안 좋아지고 마땅한 가족도 없다 보니 다시 소록도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2010년 소록도 내 주택들이 리모델링되고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좋아지자 부쩍 이런 현상이 늘었다. 빈집만 있으면 한센인 누구든 이곳에 와서 살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여기저기 알려지자 작년에는 이를 악용해 가짜 환자로 둔갑해 입원한 웃지 못 할 사례도 있었다.

Q. 이 장로님 또한 소록도를 떠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나이도 많고 이제는 소록도가 좋다. 나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 행복지수가 높다. 과거에는 사는 집마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형편없었지만 지금은 깨끗하게 잘 지어져있다. 모르긴 몰라도 일반 아파트 생활하는 사람들 수준일 것이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TV 방송 보면 배고픈 사람들이 많은데 이제는 그런 걱정이 없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건강을 책임져주는 의료진들이 많이 확보됐다는 것이다. 소록도는 우리나라 최고 한센병 관리 기관인 국립소록도병원이 세워진 곳이다. 한센병뿐만 아니라 암 같은 큰 병에 걸려도 초기에 발견해 치료받을 수 있다. 이제까지 소록도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참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지나간 과거는 다 좋게 흘려보내야 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살아온 지난 시간을 원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 같다. 과거 정부와 사회로부터 어떤 일을 겪어왔든 간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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