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대학원 석사 과정 때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 교수가 되어 잘 살고 있는 모 선배, 그 역시도 한 때는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보따리 시간 강사였다. 대부분의 대학이 성적정정기간 중이었던 어느 날, 선배가 연구실 앞에서 내게 짤막하게 고충을 토로했다. 이제부터 학생들이 전화를 걸어올 텐데,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씁쓸해진다고 했다.

어쩌겠어요. 근거자료들을 대면서 납득시켜줘야죠.

그는 단순히 이의제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지난 학기였다. 한 학기 내내 자신을 유난히 따르던 학생이 성적정정기간 중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그 학생의 첫 마디가 선배를 당황케 했다.

강사님.

학생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학기 동안에는 꼬박꼬박 ‘교수님’, ‘교수님’ 하며 따라다니던 학생이 성적에 불만이 생기자 곧바로 명칭을 바꿔 부른 것이다. 강사라는 호칭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가 상처를 받았던 것은 일부러 호칭에 변화를 주어 자신으로 하여금 대학 사회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었던 학생의 잔인한 태도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는 호칭에 상당히 민감한 사회다. 특히 서로의 관계가 수직적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선출직 공무원이나 전문직처럼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성 뒤에 해당 직업을 붙여서 불러줘야 하고,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직장에서는 직급을 통해 서로를 구분한다. 위의 사례처럼 특정 호칭을 통해 상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것을 단순히 권위적인 사람들만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정보가 적고 관계의 경사도에 따라 어법과 태도가 달라지는 우리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직업을 물어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자신이야 호칭 문제에서 자유롭고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이 편하게 부르라고 해서 정말 편하게 불렀다가 나중에 경을 쳤던 경험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번쯤은 있게 마련이다.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가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를 어떻게 표현하는가도 중요하다. 언젠가 자신을 복잡하게 설명해야만 하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슬픈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마치 예전 아파트 광고처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칼럼 란을 제안 받았을 때 난감했던 것 역시도 이름 옆에 붙는 명칭이었다. 다행히도 ‘칼럼리스트’라는 적절한 대안이 존재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없었더라면 나는 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했을까.

이런 사회에서는 서로가 초면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실례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권투에서 잽을 통해 서로의 거리를 가늠하듯, 중립적인 호칭을 통해 수직의 낙폭을 가늠한다. 그 잽의 호칭이 예전에는 ‘사장님’이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고객의 이름을 불러 서비스를 해야 하는 가게 등에서 우리는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한때 자신의 가게, 자신의 사업체, 자신의 택시를 갖고 있는 것이 선망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그러한 욕망의 발현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사장님이 되어 호칭의 인플레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사장님이라는 표현이 예전만큼 자주 들리지 않게 된 것 역시도 자영업자의 힘든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의 기업체 대표님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장님’들은 이제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최근에 그 대체제로 나타난 표현은 ‘선생님’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초면에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에서 근무하는 기능직 공무원을 ‘선생님’으로 불러야 하는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것을 떠올려 보면 예상치 못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처럼 공동체는 무너졌지만 아직 개인은 바로 서지 못한 사회에서 일거에 호칭의 개혁을 이루기란 쉽지 않다. 존댓말과 반말이 공존하는 언어습관 역시도 인위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적이지 않은 관계에서는 아예 모두를 존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와 수직적 관계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일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개나 소나 선생님이라 불린다며 불쾌함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중립적인 호칭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며 욕망을 채워주는 것보다 서로가 서로를 선생으로 모시며 존중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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