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성종 6년(1475), 주원이라는 사람이 죽은 사건이 성종에게 보고된다.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1475) 6월 9일 병술 7번째 기사에 사건의 정황이 자세히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인은 양인(良人) 여성인 석을금과 건리였는데[이름을 봤을 때는 양인이 아닌 노비인 것으로 보이는데, 『성종실록』에는 양녀(良女), 즉 양인 여성이라고 밝혔다.], 시장 가운데에서 주원(朱元)과 서로 싸워, 한 사람은 주원의 옷깃을 눌러 잡고, 한 사람은 머리로 주원의 가슴팍을 들이받아, 주원을 그날로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성종은 국문하여 그 결과를 아뢰라는 뜻을 의금부에 전달하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주원의 사망 이유를 밝히는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에 같은 날 성종은 사헌부에 다음과 같은 뜻을 전달한다.

사헌부(司憲府)에 전지(傳旨)하기를,

"형조(刑曹)의 관리가 주원(朱元)이 죽음에 이른 이유를 급히 다스리지 않고, 열흘이나 지나서 시체가 부패한 뒤에, 다시 증명하고 검사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논하지 말 것을 계청(啓請)한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니, 국문하여 아뢰도록 하라.“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1475) 6월 9일 병술 8번째 기사.

형조에서는 왜 주원의 사망 원인을 빠르게 밝히지 않은 것일까? 다음 날, 즉 성종 6년 6월 10일의 『성종실록』 기록에서 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날 공조정랑 유효장(柳孝章) 동부승지 현석규(玄碩圭) 등과 의논하는 자리에서 성종은 우선 형조에서 주원(朱元)의 시체가 온 몸이 자주빛과 붉은 빛으로 되었다는데, 형조(刑曹)에서 오래 지체하면서 끝까지 추궁하지 아니하였고, 시체가 썩은 뒤에 또 논하지 말도록 청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성종은 법관(法官)으로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의 여부를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에 현석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형조에서 진실로 너무 늦어졌습니다. 그러나 어찌 사사로운 정(情)을 품고 논하지 말 것을 청하겠습니까? 다만 한성부(漢城府)에서 검시(檢屍)를 자세히 하지 아니하였고, 삼절린(三切隣-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이웃의 세 집, 혹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의 형신(刑訊-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며 캐묻던 일)을 받는데 불복(不服)하였으며, 청리(聽理-송사를 자세히 듣고 심리함. 출처. 네이버 사전)하는 데에 의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논하지 말도록 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원이 석을금 등과 더불어 서로 싸우고, 그날 밤중에 죽었으니, 비록 상처가 없다고 하더라도 머리로 가슴팍을 들이받았으니, 내상(內傷)과 번만(煩懣-가슴이 막혀서 아픈 일을 말함.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이 이와 같으면서, 물을 마시는 자는 즉시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시신(屍身)이 자주 빛과 붉은 빛으로 되었고, 팔굼치 속에 푸른 빛이 있었으니, 그가 싸움으로 죽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1475) 6월 10일 정해 3번째 기사.

현석규의 답변을 요약하면, 형조에서 사적인 문제로 일처리를 늦게 한 것이 아니라, 심문 과정에 어려움도 있었고, 싸움의 과정에서 가해자가 주원의 가슴을 때려서 죽은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검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시, 즉 부검을 그렇게 자세히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절린, 즉 이웃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의 목격자가 있었다면, 모두 심문을 했어야 되고, 사람을 죽인 사람을 한 번 심문해서 그 실제 정황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은 승지들이 반드시 자세히 살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주원의 치사(致死) 사건과 이에 대한 성종의 대응을 살펴봤을 때, 성종은 시종일관 “사인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즉 주원을 부검하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인을 좀 더 확실하게 밝히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의미이다. 수많은 목격자는 물론, CCTV와 생방송까지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사람의 치사 사건이 있을 때 부검 역시 다 밝혀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말아야 된다.

그리고 주원을 부검하려고 하는 성종의 의도에는 공정함이 있다. 그런데 만약에, 국가가 가해자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 부검은 아마 국가가 가해했다는 사실을 덮으려는 의도가 더 크다는 의문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주원의 부검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로 삼았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형조에서 속히 다시 시신을 살펴보지 아니하고, 부패한 뒤에 이르러서야 논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법을 받드는 뜻이겠느냐?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1475) 6월 10일 정해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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