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어떤 사회적 논란은 ‘상식을 다루는 방식’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본질을 알 수 있다. 때론 복잡한 사실 관계가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백남기씨 사망사건 논란이 그렇다. 이 사건과 관련해 다양한 법리적·의학적 주장이 분분하지만, 정작 그것은 사안의 맨 얼굴이 아니다.

상식은 주관의 교집합이다. 각자의 주관은 늘 충돌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동의 할 수 있는 만큼 합의 할 필요가 있다. 태양은 동쪽에서 뜨고 남을 때리면 안 된다는 등의 인식을 공유해야 소통과 협력이 쉬워진다. 상식은 규범의 출발선이다. 나아가 집단이 커지면서 늘어나는 주관의 양에 대응하려면, 규범으로서의 상식은 보다 정밀한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 때 세계에 대한 객관화가 과학이고, 관계에 대한 객관화가 법이다.

국가는 이러한 노력의 최대치를 반영한다.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상식들이 만나 충돌 할 때, 객관화 된 법과 제도로서 갈등을 조정하는 것에 국민이 동의함으로써 국가는 존재한다. 따라서 정부는 임의의 주장이 사회 규범을 독점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 특정한 주관적 범주 안에서 어떤 주장이 상식처럼 유통된다고 해서 정부가 그 편에 설 수는 없다. 이것은 기존의 법과 제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다룰 때에도 동일하다. 끊임없이 보완되는 법과 제도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구성원들에 의해 시시각각 새로운 합의를 요구 받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공권력은 어느 일방의 시각이나 주장을 대리해선 안 된다.

백남기씨의 사망을 둘러싼 논란도 결국 기존의 법과 제도에 대해 서로의 인식이 충돌하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면 각자가 인식하는 법에 대한 상식, 제도에 대한 상식, 국가에 대한 상식의 충돌이다. 시위의 적법성부터 시작해서 의료행위의 당위성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은 기존에 우리 사회가 구축한 객관화 된 지표로서의 규범이 과연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지를 다루는 일이다. 그만큼 각각의 주장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려면 해당 분야를 오래 공부하고 경험한 전문가들의 판단이 필요해 지고 논란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나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상세지점들 보다 중요한 것은 충돌하는 상식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다.

다른 첨예한 지점들에 비해 작게 다뤄지고 있지만, 서울대병원에 경찰병력이 배치된 시점은 정부의 태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부검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대해 관계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이 때 갈등의 조정자인 정부가 취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설득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백씨가 사망한지 수 시간이 채 안 돼 유족 측과 사전 상의 없이 경찰병력부터 배치했다. 이 상황만으로도 백남기씨가 누워 있던 지난 320여일간, 부검의 필요와 당위에 대해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 내내 정부가 어떤 태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정부가 유족 측을 갈등 조정의 대상이 아닌 적대적 일방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국가 외부의 적대세력, 가령 전쟁 중 적국과의 갈등에서 보이는 태도와 유사하다. 정부는 스스로 어느 일방의 반대편에서 충돌의 당사자를 자처함으로써 갈등해결의 임무를 져버렸다. 유족측이 이런 정부를 상대로 신뢰감을 가지기는 매우 힘들고, 따라서 정부의 부검 강행에 대한 저의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애초 이 사건의 발단은 농민들의 대정부 시위였다. 이 시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은 각기 다르다. 따라서 정부 정책을 성토하는 장이었다고 해도 결국 시위대의 외침은 사회적 갈등의 표명이고, 정부는 갈등조정자여야 했을 뿐 이해당사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가 조정자의 역할을 항상 상기하고 있다면, 시위 대응과정에서 생긴 불의의 사고에 대해 적극적인 유감을 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과에 미온적인 정부 관계자들의 입장을 보면 그들이 갈등의 당사자성에 깊이 매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수차의 수압을 논점으로 다루거나, 시위의 적법성을 따지거나, 병사냐 외인사냐 판단하자는 주장이 앞서는 것은 당사자로서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 더해 여당은 물론 보수집단까지 나서 유족 측의 주장을 왜곡시키는 발언마저 서슴지 않는다.

정부와 여당의 이런 행위는 갈등의 한 축인 시위대나 유족 측의 반대편을 스스로 자임함으로써, 다른 한 쪽이 지지하는 상식이 강제 되도록 특정 세력을 권력화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동의한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에 부여한 위상을 뛰어넘는 사익 행위다. 법과 제도의 존엄은 기존에 합의된 법과 제도로서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정부와 공권력은 이에 충실 할 때에만 비로소 정당성을 가진다.

호랑이로선 토끼를 잡아먹는 것이 상식이다. 토끼에겐 잡아먹히지 않으려 도망치는 것이 상식이다. 자연은 갈등을 조정하지 않는다. 야만의 상식이 지배하는 세계다. 우리는 지금 야만이 상식처럼 돌아다니는 나라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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