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리어왕의 곁엔 늘 광대가 있었다. 몰락한 왕이 되어 광야를 헤매던 비참한 순간에도 광대는 항상 함께 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리어의 괴팍함을 비꼬았다.

17세기 초에 지어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리어왕’은 믿었던 두 딸에게 나라를 물려줬다가 배신당하고 미쳐버린 왕 리어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가족관계와 권력다툼이 여러 겹의 암투로 얽혀 있다. 등장인물들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욕망을 향해 치열하게 나아간다. 그런 그들 사이에 미천한 광대가 있었다. 명령 한마디로 사람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왕을 수시로 놀리는 게 그의 일이었으니, 여간 위험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광대는 줄거리 내내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작중에서 광대의 표기는 ‘Fool’인데, 바보 혹은 헛소리 하는 사람 정도의 의미다. 중세의 궁중광대는 눈치 없고 모자란 인물을 자처함으로써 모략을 궁리하는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권세가들을 향한 조롱은 물정 모르는 바보의 헛소리라는 유희의 묵계 안에서 보호 받았다. 덕분에 최하층민이던 그들은 권력 심장부의 부조리를 놀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면책 약속이 지켜짐으로써 권위의 속살을 건드리는 광대의 신랄한 농담이 가능했다. 광대에게 있어 농담의 예리함과 면책의 보장은 불가분의 관계다.

셰익스피어가 광대를 등장시킨 건, 거침없는 광대의 농담을 통해 관객에게 인물의 속내와 사건의 맥락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대신 광대는 상황을 유발하거나 이끌지 않으며 외부에 머문다. 광대가 사건에 개입되는 경우는 한가지 뿐으로, 광대에게 광대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경우다. 영화 ‘왕의 남자(2005)’에서 광대 공길은 왕과 대신들이 광대극으로부터 정치적 가치를 떠올리자 사건의 중심이 되어 파국을 맞는다. 그들이 광대에게 현실의 가치를 부여한 이유는 광대의 조롱이 무대 밖 객석에서도 실질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즉 이해당사자의 무의식은 치부의 실체를 인정하지만 이를 부정하고 싶을 때, 사실관계를 따지고 반론의 증거를 들이밀거나 무력을 써서라도 농담을 파쇄 하려는 행동이 나온다.

권력의 부조리를 조롱하는 광대의 농담은 권력에 대한 대중의 불안을 조절한다. 권력은 구성원 각자의 욕망에 따른 선택의 힘점들이 중첩해 만들어낸 구조적 압력이다. 반면 상황의 외역에서 구조에 개입하지 않는 광대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롭다. 때문에 광대는 구조에 깃든 압력만큼 팽창한 부조리를 농담이라는 저압의 공간으로 뽑아내 만천하에 분사한다. 그 결과 우리는 꽉 짜인 현실의 단단한 갑주에 갇혀 있던 높은 내압을 마음껏 표출하는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광대가 없다면 압력은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해 폭발하면서 구조를 허물어뜨린다. 망가진 사회에선 광대가 사라지고 웃음이 없다.

광대가 제 역할을 못할 때, 농담은 구조에 안착하여 권력에 복무한다. 권력을 조롱하지 못하는 광대는 약자를 조롱한다. 개그맨을 비롯한 예능인들이 광대의 역할을 담당하는 오늘날, 많은 TV 개그 프로그램들이 성소수자, 여성, 지력, 외모, 인종 등을 빈번하게 조롱의 소재로 삼는 것은 우리시대의 광대가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회문제를 예능으로 접근했던 MBC ‘무한도전’이 겪었던 수모와, 대통령의 후보시절을 풍자하던 ‘SNL’의 텔레토비 코너가 흔적없이 사라진 것을 기억한다. 우리사회의 광대는 팔이 꺾이고 입이 막혔다.

최근엔 방송인 김제동씨가 모 예능프로에서 했던 농담으로 인해 연일 논란을 겪고 있다. 20여년 전에 장교의 아내를 아주머니로 불러서 영창에 갔다는 농담 한마디를 정치쟁점화 시킨 것이다.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은 그를 국감 증인으로 불러 사실여부를 가리자더니, 국방부는 병적기록표를 찾아가며 확인하고, 급기야 웬 시민단체가 그를 고발했다. 평소 김씨가 정부 기조를 입담의 소재로 써 왔던 것을 불쾌해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거둘 수 없다. 농담에도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 왕의 남자에서 광대 공길이 어떻게 상황에 개입되고 사건화 됐는지를 상기하면 이 논란의 민낯을 짐작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문제의 원인은 방송인 김제동이 아니다. 본래 농담의 배경이 온전하다면 그 걸 들춰내 놀릴 일도 없다. 가령 리어왕에서 ‘지체 높으신 분들이 나 혼자 광대 노릇하게 두질 않아요. 광대 일을 독차지 하고 싶지만 그 양반들이 한 몫 하면서 끼어들죠’라는 광대의 대사는, 극 중 귀족들의 행태가 바르다면 나오지 않았을 조롱이다. 나아가 작품이 발표된 당대의 관객들이 동감 할 수 없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표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국방 분야가 농담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는 인식은 비단 김씨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우스개가 통하는 것이다.

김씨를 국감 증인으로 부르자는 제안에 대해, 국회 국방위 김영우 위원장은 국감장을 연예인의 공연 무대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했지만, 여태껏 정부여당이 그의 공연을 외면하며 듣지 않아온 것이 오히려 문제의 핵심이다. 국회에서 김제동의 공연을 열고 농담을 새겨들으면 논란은 해결된다. 리어는 광대의 조롱에 관대했지만, 조롱에 담긴 경고에도 똑같이 무감했다. 그는 결국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코델리어의 주검 앞에 자책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권력이 만들어내는 부조리의 압력과 광대가 탈출 시키는 해방감의 압력이 비슷할 때 사회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이 둘은 서로 보완의 관계다. 현실세계의 권력이 눈에 보이는 권력이라면, 광대는 현실이 내압을 견디고 유지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 보이지 않는 힘을 갖는 것, 우스운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일종의 권리다. 광대는 시민이 지켜내야 할 권리다. 우리에겐 김제동이라는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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