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재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청와대 비선실세.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무수한 뉴스와 언급들 중에서 가장 슬프게 다가왔던 표현 하나가 있었다.

헬피엔딩.

어느 누리꾼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한 글에 들어있는 표현이었는데, 본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 난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책임지는 이도, 제대로 처벌 받는 이도 없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예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헬피엔딩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멈추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도 우리의 전형적인 역사처럼 헬조선의 헬피엔딩으로 끝나리라는 이 집단적인 우울함은 과연 어떤 결론을 맞이하게 될까. 나는 조심스럽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의 전개를 돌아보자. 나는 대통령의 비선 문제가 이번 정권에서는 결코 이슈화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SNS에서 해시태그 운동이 전개될 때도 어차피 해결되지 못할 사안에 시민들이 괜한 힘을 쏟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전 국민이 TV 화면을 통해 아이들이 억울하게 수장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면 단순히 패배의식의 발로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견고해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이렇게나 흔들리고 있다.

언론 보도는 또 어떠한가. 성향이 다른 언론사들끼리 하나의 주제를 놓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이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진보적 이미지의 언론인이 보수 성향 방송국의 경영자로 옮겨갈 때는 또 어땠을까. 분명 당시의 예측과 비판들은 합리적이었지만 미래는 지금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얼마 전 SNS에서 읽었던 어떤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역사의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 앞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란 얼마나 미미한 것인가. 정치나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변수의 수가 거의 무한정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예측이 힘을 받으면 모두가 거기에 대응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합리적이었던 통찰이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예측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터지고 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목소리가 뒤늦게나마 ‘혜안’으로 발굴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쩌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혜안으로 살아남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으로서 이번에 다잡게 된 삶의 결론은 역설적이다. 나는 앞으로 내 자신의 자유의지를 더욱 신뢰하고 그에 따른 실천에 집중하려고 한다. 어차피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면, 파편화된 정보로 이뤄진 정치공학으로 내 생각을 억압하거나 전략적 판단이라는 미명 아래 주변인을 훈계하려 들기 보다는, 평소에 공부하고 훈련하며 갈고 닦은 상식의 눈으로 세계를 솔직하게 바라보는 것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을 일을 찾아 집중하고 발언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정치인의 사적 이익을 위한 발언이 때로는 공적으로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그 정치인을 비판하지 말자고 제안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며 정치적 면죄부를 발행했다가 그 정치인이 훗날 어떤 사회적 해악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당장의 사건들 역시 그때 우리가 그렇게 발언하고 행동했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의 입장과 판단에 따라 자신의 의지에 집중하면 된다. 자기만의 돛단배를 시간이라는 거대한 강물 위에 띄우고 또 띄우는 것이다. 누구의 돛단배가 역사의 바다까지 흘러가게 될지 지금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