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 최근 우연히 MBC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보게 됐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즐겨 보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관심이 적었던 관계로 첫 방영 시기를 한참 놓치고 조금 늦게 케이블의 재방송을 보았지만, 역사를 주제로 하는 내용이라 해서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이다.

필자의 관심을 끈 프로그램 취지는 ‘요즘 같이 혼란스러운 시국을 맞아,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명 래퍼들을 모아 무한도전 멤버들과 짝을 지은 다음, 역사적 교훈을 통해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자는 취지를 랩으로 표현해보자는 것 같다. 그런데 연예인들이 역사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먼저 한국사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게 했다. 역사 전문가 아닌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대안 없는 선택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가 굳이 평소 즐기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보고, 이를 대상으로 칼럼까지 쓰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이날 등장한 한국사 전문 강사와 강의 내용 때문이다. 사실 이 프로그램에서 강의를 맡은 한국사 전문 강사가 소개되었을 때부터 좀 불길했다. 얼마 전 ‘고려가 대한민국 버금가게 평등한 사회였다’고 설파했던 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의 강의는 필자의 우려를 저버리지(?) 않았다.

시작은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임진왜란 때 무능과 나태로 국가의 위기를 자초한 왕과 양반이 먼저 도망갔다는 사실과, 고려 말 기득권층의 착취에 시달린 백성들이 지었다는 청산별곡을 소개하며 힘없는 사람들 생각해주는 척했으니까. 이런 맥락에서 이번 무한도전 출연자들이 지은 랩이, 청산별곡처럼 후세에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를 알려주는 주요 자료가 될 수 있다며 한껏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데 막상 강의가 본론으로 접어들자 금방 본색을 드러냈다. 물론 왜 ‘본색을 드러냈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번 편 무한도전을 본 시청자들은 물론 당사자인 무한도전 출연자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강사의 강의에 감동받은 ‘리액션’만 보아도 그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의 강의가 이렇게 감동해도 좋을 내용인지 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언급했던 화랑도 관련 내용부터 살펴보자. 이 인기 강사는 화랑도가 신라 청소년들을 좋은 곳 다니며 교육시켜 ‘내적 단합’을 이루어내는 역할을 했다고 가르쳤다. 우리 한국사 교육에서 강조했던 고전적 내용이니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이 ‘내적 단합’을 이루어낸 구심점 화랑은 유능하다고 아무나 시켰을까. 결국 골족 귀족 위주로 고른 신분 좋은 인물이 중심 되는 거 아닌가. 그랬으니 이 인기강사께서 스스로의 입으로 문제라고 지적하셨던 ‘골품제’ 같은 체제가 되는 것이다. 골품제는 문제라고 지적해놓고, 이 골품제 시스템을 지키려고 만든 조직은 ‘내적 단합’을 이루어냈다고 칭송하는 강의에 문제가 없어 보이나.

이른바 8만대장경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측면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불교국가였던 고려가 부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려는 의도로 만들 것이 대장경이다. 그런데 고려 초에 만들어 거란을 물리친 효과가 있었다고 여긴 대장경이 몽골 침입 때 불타 버렸다. 그러자 대장경을 새로 만들어 지금의 합천 해인사에 보관했다. 이런 대장경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귀중한 문화재를 만든 정신을 높이 사자는 뜻이 되겠다.

그런데 이 역시 한번만 더 생각해보자. 지금도 심각한 사회 문제가 연이어 터지는 위기국면이다. 그런데 지금 이런 위기를 극복하자고 막대한 자금 들여 희망을 갈구하는 염원 담아 상징물을 만들자고 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사업 나쁠 것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 많을 것이다. 그런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수습해야 할 분야에 투입하기에도 모자라는 자금을, 그저 믿는 사람 정신승리에나 효과 있을 상징물 만드는데 쏟아 붓는 행태가 국가에 도움 될까.

특히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는 사람이 죽고 중요한 시설들이 파괴되는 사태를 막는데 우선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려 조정은 이런 상황에서 ‘염원을 담은’ 목판이나 만들고 있었다. 이걸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자금이 들어갔는지는 인기 강사 자신이 강조했으니 더 말을 보탤 필요 없겠다. 이는 당시 고려 조정은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던 와중에도, 자신들과 야합한 불교 기득권 세력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런 규모의 목판 대장경을 만들자면 만만치 않은 자금이 들 것인데, 경제력이 현대와 비교도 안될 만큼 빈약한 당시로서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비용 들이고도 정말 부처님 은혜로 나라 지켰나. 8만 대장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오히려 일제 식민지 시대 빼고는 가장 강력하게 외세의 통제를 받는 굴욕을 당했다. 대장경 자체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과 그러니 그런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비극적 배경까지 무시해도 좋다는 점은 별개 차원이다. 이런 사실 무시하고 8만 대장경이 중요한 문화재이니 전쟁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런 것 만들고 있는 게 칭송받을 일이라고만 미화해주면, 앞으로도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런 사업 벌이자는 사람 안 나올까. 하긴 필자는 지금도 이런 사람들 숱하게 보고 있다.

사실 이 정도는 예고편이다. 바로 뒤에 이어진 ‘왕의 이름이 왜 한 글자로 되어 있을까’에 관련된 내용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수준이니까. 이 강사께서는 중국이나 한국 전근대에는 황제나 왕의 이름을 못 쓰게 하는 관례가 있어, 백성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한 글자만 써서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설명만 듣고 나면, 이 역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배려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출연자들의 실제 반응도 그랬다.

그런데 좀 뒤집어 생각해보자. 애초부터 통치자 이름에 쓰인 글자라는 이유로 백성이 멀쩡하게 써오던 글자를 못 쓰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른바 ‘갑질’아닌가. 그래놓고 두 글자 씩이나 못쓰게 하면 불편할 테니, 이름을 한 글자로만 지었다는 점에 그리도 감동을 받아야 할까. 그런데도 당시 지배층이 마치 대단한 은혜나 베푼 것처럼 설명했고, 이를 들은 출연자들 역시 감동해 마지않았다. 이런 걸 보면 사람 우롱하기 참 쉬운 것 같다.

한글에 깃들어 있다는 ‘애민정신’ 역시 그렇게 감동받을 측면만 가진 이야기가 아니다. 글자를 몰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백성들을 딱하게 여긴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두고 왜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느냐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럴 만큼 이면에서 지적되어 왔던 이야기까지 아는 사람은 좀 드물다.

여기서도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그렇게까지 백성을 아껴 한글을 만들었다면, 무엇 때문에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 시험 같은 과정에서는 한글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렇게 힘들여 개발한 한글로 만들어낸 첫 번째 책이 뭐였나. 정답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이 책의 내용은 태조 이성계 뿐 아니라, 그 앞의 5대조까지 나라를 세울 만큼 위대한 가문이었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정권 홍보물’인 셈이다.

이런 점 알고 보면 한글 창제의 동기에도 ‘불편한 진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세종대왕이라도 왕정체제의 수장이 시대를 뛰어 넘어 민주적인 발상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 즉 한글은 백성들의 의사가 지배층에 전달되게 하기보다, 지배층의 입장을 백성들에 주입시키는 역할의 비중이 더 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강의 내용 대부분은 철저하게 기득권층을 미화하는 쪽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군사정권 시절부터 국민들에게 주입시키려 애쓰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요즘 바로 이런 내용들을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는 식으로 띄워주고도 있다. 이렇게 좋은 측면만 부각시키는 버릇이 들면 ‘나라를 위해 기업들에게 돈 끌어 모아 좋은 일 하려 했다’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변명까지도 ‘애국심의 발로’라고 미화해줄 수 있겠다.

어쩌면 그동안 색깔 변화 과시해왔던 MBC가 이런 시국에 ‘역사에서 교훈 찾자’며 인기 예능 프로그램 끌어들인 이유 자체가 이러자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인 역사관 가진 인기 한국사 강사 끌어들여, ‘역사도 이렇게 좋게만 해석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메시지 던진 셈이니까. 하긴 한국사 전문가라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군사정권 시대에 주입시키려던 구태의연한 내용을 설파하면서도, 이 강사가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긍정적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태도가 퍼져야 우리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반대를 무릅쓰고 만들어낸 한국사 국정 교과서의 태도 역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아무리 문제 많은 내용의 강의를 해도 끈질기게 방송에서 띄워주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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